아나운서, 최세훈/아버지의 책, 증언대의 앵무새

이니히비키타 [말의 화가]

최철미 2015. 6. 14. 08:39

□ 이니히비키타

1953년 제 1회 아시아 야구대회에 윤길구 아나운서가 파견되었다.
애인(삐따에의 그리움)과 함께 마닐라에서 돌아온 호방한 로맨스·그레이는 아름다운 갈색 스킨의 아가씨가 가르쳐 준 몇 마디의 밀어를 큰 소리로 전수했다.
『어여뿐 여자는「마간당·달라가」아주 예쁘다는「마간당」위에「삐나까」가 붙어요! 우리 애인 삐따는 최고의「삐나까 마간당」이지…「당신을 사랑한다」는 말은 뭐라고 하느냐구? 그거 참 중요한 질문이야「이니히비키타」…「히」짜에 감정을 넣어야 돼!』
이 단기 속성 비율빈어 강좌에 대해 지금도 생각한다.
「사라마뽀(감사합니다).」
다음 해 5월 제 2회 아시아 경기대회에 윤계장을 수행한 최승주 주임만이 이들의 재회에 참여해서 한비친선을 돈독히 했다.
「그대는 아는 가 저 남쪽 나라를」
그러나 윤길구 씨는 최승주 아나운서와 함께 거리를 산책하다가 「쨉(JAP)」으로 몰려 위기일발.
한국인 특사가 일본사람으로 오인되어 변을 당할 만큼 비율빈은 반일감정이 거셋고 마닐라 방송국 직원들까지도 포로수용소를 상기시키며 쨉과 꼬리아노가 무엇이 다르냐고 내뱉는 싸늘한 정황이었다,
6,7명의ㅏ 험상궂은「삐리삐노」들은 윤길구 씨와 최승주 아나운서 유병은 기술계장을 둘러싸고 다중의 위력으로 압박해왔다.
담배를 달라는 것이 첫 인사, 입에 물고 불을 댕기라는 두 번째 인사는 사뭇 공갈, 라이터를 켜는 동안 포위망은 점점 좁아 들었다.
한 놈이 어디서 뭘 하려 왔느냐고 물었다.
한국에서 경기에 참가하려 왔다고 하니 무슨 경기냐고 재쳐 물었다.
옳지 이때다. 윤길구 씨는 주먹을 내밀어 권투선수의 폼을 취했다.
그들은 한 발자국 물러섰다.
다른 놈이 최승주 아나운서에게 무슨 경기를 하느냐고 물었다. 그는 레슬링 자세로 으스댔다,
그들은 또 한 발짝 물러섰다.
이리가 갑자기 양의 가죽을 둘러쓰듯 안면근육이 이완된 그들은 부럽다는 듯 큰 소리로 지꺼려댔다.
『꼬리아노 스또롱 아』
강하긴 뭐가 강해! 이 두 사람의 한국인은 권투와 레슬링은 룰만 알고 구경이나 했을 따름인 착한 선비들이었다.
같은 해인 1954년, 도쿄에서 열린 세계 축구선수권대회 극동지역 예선은 현해탄을 사이에 둔 국민감정의 대결장이었다. 우리 팀의 슛이 성공하자 양대석 아나운서는 36년간의 울분을 혼자서 푸는 듯 더욱 콧소리를 냈다.
『본 아나운서 감격해서 뭐라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럼 누가 말해야 되나요?』
반문해 오는 전화벨의 연속음….
중계방송을 듣는 이의 수준도 계몽시대를 벗어나고 있었다.
국제교류가 활발해진 황금시대에 축구의 임택근 아나운서, 야구의 황우겸 아나운서가 기성의 파고다 위에 올라섰다.
제 2회 아시아 야구대회는 1955년에 또 마닐라에서 열렸다.
윤길구 씨는 세 번째의 비율빈행. 삐따는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나 좋지 않은 것이 있었다.
한국군의 운수. 7대 0의 패배를 설욕하려는 한국과 일본의 2차전, 게임은 9회 초, 스코어는 5대 5, 이사만루의 굿 찬스, 타자의 볼 카운트는 투 쓰리, 풀.
007보다 더 절대 절명의 위기,
『핏쳐 셑 포지션! 던졌읍니다앗…』
날카로운 백선, 둔탁한 캣치의 음향….
그러나 닥터·노 같은 중국인 암파이어는 가마귀 소리로,
『스트라잌!』
억울한 억울한 심판이었다.
부풀었던 풍선이 팡 터지는 것 같은 실망의 한숨 소리가 마닐라에도 미쳤는가?
윤길구씨는 분루를 삼키며 동조를 구했다.
『황군에게 물어 보겠습니다. 저렇게 공정치 못한 심판을 본 일이 있습니까?』
황군이란 황우겸 아나운서, 해방 후라 황군은 아니겠고 처음 듣는 사람은 무슨 암호인가 여겼을 것이다.
암호 방송도 있었을 때니 말이다.
처음 해외중계에 출정했던 일을 황우겸 씨는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머나 먼 마닐라이기에 과연 내 목소리가 국내에서 잘 들릴까 반신반의 했다. 경험이 없는데다 전파에 깊은 지식이 없어 소리를 크게 질렀다.』
웅변대회 연사처럼 톤을 높여야 들리는 것 같은 귀여운 착각에너지의 낭비 때문인지 그는 마침내 지쳤다.
『또한 기후와 음식이 우리와 정반대인 나라이기에 탈이 나서 병석에 눕게 되었다.』
이 남국의 에뜨랑제는 먹고 마시지 못하고 수출(?)만 해서 탈수현상을 일으켰다.
뭐든지 수입을 해야 중계를 할텐데…하는 사명감 때문에 죽을 먹기로 했다.
앗 참 그런데 죽을 영어로 뭐라고 하나? 식탁에 턱을 고이고 앉아 그는 고민했다.
벙어리처럼 수화로 얘기한다? 아니! 나는 코리아의 신사, 다가온 웨이터에게 그는 힘없이 말했다.
「오트밀!」
이 기름진 유동식이 빈속에 들어가자 수출은 증대일로, GRUEL, 하다못해 Soft Diet조차 생각이 나지 않은 나그네는 병원 문을 노크했다.
『주사를 맞아 가면서 방송을 하게 되었는데 우리 팀이 리이드 하다가는 역전되는 것이 두서너 번.... 손에 땀을 쥐다가도 분통한 장면이 연이어 전개되지 않는가. 가뜩이나 몸이 아파 짜증이 나는데 우리 선수들이 잘 하다가도 공연한 실수를 해서 역경에 바지게 되니 그 순간 무의식중에 쓰고 있던 만년필을 내던져 버렸다.』
황선배가 그의 성처럼 노란 바나나를 한 트렁크나 가져온 것은 마닐라의 귀로였던가.
9회전까지의 야구중계를 해설자 없이 한 사람의 캐스터가 담당하는 것은 벅찬 일이었다. 황군이 아직 데뷔하기 전 목이 마른 윤길구 씨는 옆에 앉아 경기를 관람하던 장기범 씨에게 갑자기 구원을 청했다.
『장기범 씨 지금 관중이 얼마나 될까요?』
기습을 받은 그는 냉철하게 역습했다.
『글쎄요 얼마나 되리라고 보십니까?』
물을 따른 컵을 입에 가져가려던 윤길구 씨는 원망어린 눈짓으로 다시 중계를 속행했다.
1956년 제 16회 올림픽 축구예선전을 최승주 계장과 함께 일본에서 중계했던 양대석 씨는 그해 11월, 오스트랄리아까지 웅비하려했으나 노스웨스트의 타랍 위에서 출국인사를 한 것은 장기범 임택근 아나운서였다. 엔지니어 한 사람까지 하나도 아니고 하나 둘 셋이나 파견된 중계 반은 멜보론 올림픽이 처음이었다.
이 최소당위는 8년 후의 도쿄 올림픽까지 최대단위의 인원구성이었다.
외화 절약에 기여한 공로로 방송국은 왜 표창을 받지 못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