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 철미의 시모음 /시평

끝없는 감사와 찬미로 일구는 시의 텃밭 (백승철 목사님의 시평)

최철미 2014. 8. 18. 11:03

끝없는 감사와 찬미로 일구는 시의 텃밭

- 백승철 시인, 목사 (Epipodo교회, Los Angeles, CA)


하여간 자신의 삶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넉넉한 부요함이다. 시인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눈물겨운 감사이다.
이미 발표된 글에서 시인이 걸어왔던 흔적을 더듬어 올라가는 일은 그렇게도 단정한 시인의 작품을 이해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해 준다.

“…. 내 고통의 바다는 / 망각의 강보다 / 훨씬 깊고 넓었다 / 눈물샘이 갈라질 정도로 / 내겐 눈물 한 방울 남지 않았다” (해빙기 중에서)
해빙기 (解氷記) 에서 시인은 아버지와 여동생을 잃은 슬픔을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가족에 대한 지독한 사랑에 근거한다. 모든 것이 무너지고 없는 실존이다. 아버지와 동생은 그녀를 지금까지 지켜 왔던 버팀목이었다. 얼마나 시인이 아버지를 통한 삶을 형상화하고 있는지를 다음 작품으로 이해할 수 있다.
“… 아버지의 시는 / 항상 외로웠다 / 고독으로 한을 푸는/ 내 아버지의 시/ … 아버지의 남은 한은 / 제가 시로 풀렵니다.” (아버지의 시 중에서)
맺혀 있는 한의 감정이 시인의 작품 세계의 출발이다. 그 아픔의 현장에서 다시 발견하는 하나님의 은혜는 감당할 수 없는 삶의 소생이었다.

이제 시인의 작품에는 어디에도 부조리의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삶이 있는 글은 생명력이 있다. 소망의 넓은 바다이다. 나는 시인의 작품에 가슴 아파하고 눈물도 흘리고 너무 깨끗한 정화의 작용을 가슴으로 읽는다. (밑줄은 필자)

“당신께서 푸른 밤으로 오시면 / 나는 당신의 하늘을 수 놓을 / 별 빛 하나로 남겠습니다 / … 당신께서 단비로 오시면 / 나는 당신의 촉촉한 대지 위에 / 내 소망의 어린 싹을 틔워…” (연시 중에서)

“아주 멀리서도 / 느낄 수 있는 / 주님의 은혜 / 그 그윽한 향기” (옥잠화 중에서)

“… 겨울날 흩날리는 하얀 눈송이는 / 당신이 나를 위해 바친 기도의 꽃가루 / 나는 나를 한 잎 한 잎 / 모두 벗어 버리고 / 천상으로 천상으로 향하는 / 내 작은 소망의 씨앗을 품네” (나무의 노래 중에서)

“나는 지금 여기 서서 / 당신이 오시기를 기다리는 신부에요 / 당신이 내게 주신 십자가를 / 어차피 지고가야 한다며는 / 이 세상 끝날까지 / 기쁜 마음으로 / 메고 갈 수 있게 해 주세요 /… 이제 / 당신을 향한 / 그리움으로…” (신부의 노래 중에서)

“…가슴에 차오르는 / 밀물 같은 그리움 /… 당신의 사랑으로 / 내 아픔을 견디었네 / 내가 당신을 사랑하므로 / 이 슬픔도 기쁨이어라.” (자화상 중에서)

“내가 당신을 떠나려 해도 / 당신은 / 내가 당신에게 곧 돌아오리라는 것을 압니다 /… 왜 나를 사랑하느냐고 / 더 이상 묻지도 않으렵니다 /… 한 편의 시로 접어 / 당신에게 띄웁니다” (고백 중에서)

“당신을 향한 나의 기도는 / 여름 밤 은하수같이 / 빛나는 별들이 되어 / 나의 하늘로 쏟아집니다 “ (사랑의 서 중에서)

이번엔 시의 제목들만 나열하기로 한다. “은혜의 샘” “주님의 샘터에서” “주님의 말씀” “기도” “예수님 소개서” “새벽을 기다리며” - 모두가 감출 수 없는 저녁 만찬이다. 주님, 은혜, 기도, 천상, 신부, 사랑, 말씀, 새벽… 이상의 모든 시어들은 기독교적이다. 모든 것을 비우고 나서야 비로소 말할 수 있는 내면 저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오는 감격과 감사의 시어들이다. 그래서 너무 뜨거움을 느낀다. 분출되어 올라오는 찬미의 세계이다. 대개 신앙적인 글들은 완전 공개 혹은 감춰진 상태에서 우러나오는 의미 전달 형식이다. 시인의 시들은 부끄럼 없이 공개되는 시어들이다. 시의 제목도 그 영역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사실 그런 시를 쓴다는 것은 대단한 용기이다. 삶이 진솔하다는 얘기다. 시의 대상이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중심이다. 물론, 감사와 찬양으로 쓰여지는 시들이다. 결코 자신의 경험의 자리에서 방황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작품을 대하는 우리들은 작품들이 너무 단순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어린 아이와 같은 솔직한 고백의 표현이다. 그건 드러나는 신앙시의 대표적 형식이다. 읽는 사람들이 신앙적 차원에서 제한적이라는 불리한 환경을 감수해야 한다. 그래서 더 가치가 있다. 개인적인 경험의 목소리가 찬미의 형태로 걸러지는 것이다. 특이한 사실은, 일반 시들이 은유와 상징 등 형상화로 의미 전달을 시도하고 있는데 반해, 시인의 시들은 가혹하리만큼 직설적이다. 기독교적 삶으로 직접 표현하려는 애절함이다.
그러면서도 사실 나는, 시인의 작품을 대할 때면 어딘지 모르게 부족한 미완성의 단순성 (주어의 반복, 평범한 시어의 나열 등)을 찾을 수 있었는데, 혹 시인의 작품 세계의 한계가 아닌가 하는 초조함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몇 편의 다른 작품을 읽고 그 초조함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 차창으로 / 선잠 깬 나무들이 지나가고 / 어둠의 베일을 막 벗기 시작한 건물들이 지나가고 / … 하루를 앞둔 / 모습들을 본다 / 반복되는 일상의 / 무표정한 얼굴들을 본다.” (통근 열차 중에서)
“태엽 사이로 / 태고부터 쌓인 먼지가 보이는데 / … 까치발을 하고 / 넘겨다 본 내일…” (벽시계 중에서)
두 편의 시에서 실존의 무거운 형상이 통근 열차와 벽시계를 통해 그려지고 있는데 ‘하루를 앞둔’ ‘넘겨다 본 내일’ 이라는 표현에서 삶의 희망과 소망을 말하고 있다. 함축적인 의미 전달이다. 날카로운 주제 의식까지 소유하고 있다.
비 동일성의 사고로 누구보다도 철저했던 아드르노의 예술에 비한다면 하나님의 삶을 현실에서 동일하게 체험해 나가는 시인의 작품으로 적어도 우리는 서로 공유하는 찬미의 감사를 드린다.
이제부터 시작인 듯싶다. 합리적인 사고의 어린아이 같은 순수한 모습의 찬양의 노래를 우리 주변에서 많이 들려주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우리 모두에겐 나름의 텃밭이 있다. 일구고 가꾸는 일은 독자의 몫이다. 그 공간에 최철미 시인의 시어들이 거름이 될 것을, 이 글을 마치면서 기대하는 것은 사치가 아닐 것이다.

 

(이 시평은 오랜 친구이며 동역자인 시인 백승철 목사님의 글로, 십여 년 전, 에피포도 문집, "떠나는 여행의 시작" 에 실렸던 글이다.  지난 20년간 쓴 시를 모아 올 가을에 첫시집을 내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