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의 땅
계란찜
계란 두 개에 물을 조금 붓고 같이 잘 풀어서, 소금과 후추로 간을 맞춘 다음, 파를 가늘게 송송 썰어 넣고 중탕을 한다. 너무 오래 익히면 팍팍해져서 맛이 없고, 덜 익히면 계란이 설익는다. 너무 뜨거우면 입천장이 데이고, 식으면 맛이 떨어진다...... 이렇게 알맞게, 또 따뜻하게 익은 계란찜을, 아버지는 장조림 간장에 찍어 잡수시곤 했다. 방금 한 쌀밥을 갓구운 김으로 싸서 부드럽고 연한 계란찜과 같이 먹는 것만큼 진수성찬도 없었다. 적어도 우리 집 식구들한텐 그랬었다......
미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후식으로 나온 푸딩을 보며 나는 계란찜을 생각했다. 미국에 와서는 계란찜 만드는 것을 엄두도 못내고 있다가 (음식을 중탕해 먹는다는 번거로움조차도 미국에 와서는 일종의 소박한 사치가 되어버렸기에) 취직해서 받은 첫 월급으로 백화점 재고 정리센터에 가서 소형 마이크로 웨이브 오븐 (아, 이걸 한국에선 전자 렌지라고 하는 것 같았다.) 을 하나 사 가지고 온 후에나 해 먹을 수 있었다.
이곳 부엌에 으레 딸려있는 붙박이 오븐에 계란찜을 넣고 화씨 350도에서 10분간 구워내면 계란부침처럼 생긴 계란구이가 나오곤 했다. 하지만, 항상 가운데 부분이 설익어 나왔고, 그렇다고 해서 더 넣어놓으면 아예 바싹 구운 과자처럼 표면이 갈색으로 타버리기 때문에 제대로 된 계란찜을 만들지 못했다.
전자 렌지의 미디움 버튼을 누르고 3분간 익히다가 용기를 꺼내서 90도로 돌려 다시 집어넣고 2분을 더 익히면 제법 그럴듯한 계란찜이 되어 나오곤 했다. 가끔가다 깨소금을 넣어보기도 하고, 통깨를 살살 뿌려 고소한 맛을 내보려고도 했지만 웬지 옛날에 먹던 계란찜 맛은 나지 않았다.
처음 보는 음식이라며 신기해하는 미국 사람들도 한 번 먹어보고 나면 이내 맛을 들였다. '에그 파이' (egg pie) - 이름이 무어냐고 묻는 이곳 사람들에게 그냥 떠오르는대로 대답한 것이 계란찜의 미국 이름이 되어버렸다......
고향을 찾아가는 꼬끼리처럼
죽음이 예전보다 훨씬 내 가까이에 와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것은, 장례식에 보내는 조의금 지출이 부쩍 늘기 시작한 이태 전부터였다.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 생활을 시작하던 무렵에는 아는 사람 결혼식에 가져갈 축의금 챙기느라고, 좀 지나고 나서는 아이들 돌잔치에 사갈 선물 사느라고 바빴었다. 나도 어느새 나이가 들어가고 있다는 얘기였다. 늦가을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11월이 오면 이내 다가올 새해를 맞이하기가 두려울만큼, 또 한 해가 가고 있다는 사실이 섬뜩해져오는 것이었다. 또 한 해가 가는구나. 또 한 해를 더 살아야 하나보다. 그래, 꼭 한 해만 더 살아야지...... 그러기를 몇 해나 거듭했던가. 그래서 한 해 한 해를 그렇게 힘들게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마치 하루를 넘긴 하루살이처럼......
겨울이 다가오면 난 초조해졌다. 그래서 더 우울해졌다. 동생이 기일이 들어있는 11월이 오면 난 몸살, 마음살을 함께 앓았다. 겨울비라도 추적이며 내리는 날엔 며칠을 앓아눕곤 했었다. 이렇게 몸져눕는 날이면 꼭 나는 내가 죽어가는 꿈을 꾸곤 했다.
......한없이 깊고 어두운 터널 속으로 빨려들어간다. 저 멀리 가느다란 빛이 가물가물 비쳐온다. 거기까지 기어서라도 가야하는데...... 하지만 가위에라도 눌린듯 꼼짝할 수가 없다...... 뭔가라도 잡힐 듯 해서 양팔을 허우적본다. 무언가라도 잡히면 붙잡고 일어날 것만 같다...... 그러나 아무 것도 잡히지 않는다...... 그래서, 그만 포기하고 만다. 깊고 짙은 어두움 속에 몸을 웅크리고 태아처럼 눕는다. 적어도 내가 이렇게 누워 있는 동안만큼은 안전할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러면서 나는 내 자신에게 몇 번씩 되풀이해서 말하곤 했다. 이 꿈에서 깨고 싶지 않다......
그러나, 꿈에서 깨어보면 나는 여전히 살아 숨쉬고 있었다. 밤마다 죽음을 꿈꾸는 나에게 의사가 내린 진단은 우울증이었다.
죽음이 날 기다리고 있다기보다는 오히려 내가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죽지 않고 살아있는 것이 병이라면 병이었다. 재산이래야 은행 융자금을 제하고 나면 땡전 한 푼 남지 않을, 당장 집수리를 해야하는 낡은 집 한 채와, 십 년도 훨씬 넘어 털털거리는 소형 중고차 한 대가 있을 뿐이었지만, 유언장도 이미 다 써 놓은 터였다. 쓸만한 장기는 다 기증하고, 시체는 화장해서 태평양 바다에 뿌려달라는 게 남아있는 사람들에게 바라는 마지막 요청이었다. 나에게 한 가지 소원이 있다면 '죽을 때 아무런 걱정 없이 편히 가는 것' 이었다.
병원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서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던 아버지, 당신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알았으면서도 결코 용납할 수는 없었던 아버지, 엄습하던 간성 혼수 속에서 의식을 잃지 않으려던 아버지의 처절한 몸부림, 그러나 그러나, 매일 조금씩 서서히 죽어가던 아버지의 피폐한 육신. 아직은 죽지 않았음을 알리던 아버지의 가쁜 숨소리. 그 힘겨운 숨 소리가 그쳤을 때, 나는 아버지가 드디어 기나긴 임종의 고통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을 깨닫고, 우선 안도감부터 느꼈었다. 아버지를 잃었다는 슬픔은 훨씬 후에나 느낄 수 있었다....... 그로부터 수 년 후에 아무런 예고도 없이 찾아온 동생의 죽음은 아무런 감정도 느낄 수 없을 만큼 갑작스런 것이었다. 그후로 두고두고 동생의 부재를 실감하며 살아야 했다. 정말 그애가 죽었을까. 어디 먼 곳으로 훌쩍 여행이라도 떠난 것은 아닐까. 어느 날 갑자기 불쑥 찾아와서 '언니' 하고 날 부를 것만 같은데...... 이렇게 아버지와 동생의 죽음은 각기 다른 아픔으로 다가오곤 했었다. 그래서 그런지 난, 죽을 때 아무 걱정없이 편히 눈을 감고 싶었다. 빈소를 지켜줄 상주가 없어도, 찾아오는 문상객이 없어도 평화롭게 죽음을 맞이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복된 일인가.
언제부터인가, 난 내 죽음을 준비하며 살아왔다. 내가 죽고 나서 남에게 끼칠 수고를 덜어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와 동생의 유품을 정리하면서 또 며칠을 힘들어했던가. 몇 번 쓰지 않아 아직도 윤이 나는 주방 기구는 동네 교회에 갖다 주었고, 몇 권 안 되는 책도 좋아하는 친구들에게 나눠 주었다. 아직은 입을만한 옷들도 골라서 이웃에게 나누어 주었다. 남은 날들을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것들만 지니고 살고 싶어서 나름대로 주변 정리를 하면서 살아온 셈이었다. 내게 마지막으로 남은 일은 고향을 찾는 일이었다.
12년만에,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12년 8개월만에 다시 찾은 고국이었다. 김포를 떠날 적엔, 갔다가 금방 돌아올 줄만 알았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이러다가 아버지 산소 성묘 한 번 못 가고 이국 땅에서 죽어버리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순간부터, 난 마치 편집증에 걸린 사람처럼 줄곧 한국 생각에 사로 잡혀 살았다. 꼬끼리도 죽을 때는 고향을 찾는다...... 죽기 전에 한 번만이라도 고향엘 다녀오고 싶다...... 찾아갈 부모도, 돌아갈 고향도 없었던 탓에, 평생을 제멋대로 지어낸 당신의 상상의 늪 속에 살았던 나의 친어머니보다는, 머언 기억 속에서나마 돌아갈 고향이 있는 나는 얼마나 행복한가.
다시 이곳 김포에서
이런저런 생각에 마음이 착찹해져 와서, 서울로 향하는 열 두 시간의 비행 시간 동안 한숨도 눈을 붙이지 못하고, 그래서인지 꽤나 피곤하다. 내 옆 자리에 앉았던 아주머니도 미국 온 지 칠 년 만에 처음 나가는 길이라며 이번에 나가면 한 두어 달 쯤 푹 쉬다가 올 거라고 했다. '두어 달이나요? 참 좋으시겠네요. ' 나도 두어 달 쯤 시간을 낼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내게는 고작 이 주일 밖엔 시간이 없다. 아주머니와 서로 잘 가라는 인사를 하고 헤어진 후에, 나는 입국 심사를 기다리는 사람들 중의 하나가 된다. 입국 창구의 왼쪽에 '내국인' 이라는 푯말이, 오른쪽엔 '외국인' 이라는 푯말이 각각 붙어 있는 것을 본다. 문득, '아, 내가 줄을 잘못 서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와서 선 줄은 왼쪽 줄이었다. 여긴 한국이니까 하는 생각에 '내국인' 줄로 가서 섰던 것인데, 나는, 내가 '내국인'도 '외국인'도 아닌 어중간한 존재임을 깨닫고는 머쓱해져서 슬그머니 오른쪽 줄 꽁무니에 가서 선다. 미국에서도 나는 내가 '내국인'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는데......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영원한 이방인이 되어버린 나는 내 자신에게 묻는다. 나는 누구이고 또 누구여야 하는가.
회색 제복을 입은 젊은 청년이 입국 심사 창구에 앉아있다. 짧게 깎은 머리가 시원해 보인다. 반팔을 입은 것을 보니, 구월 중순인데도 아직 날씨가 더운 모양이다.
"추석 성묘 오셨습니까?"
청년은 정중하고 친철하다. 입국 용지에 있는 방문 목적란에 내가 '성묘' 라고 큰 글씨로 적어 넣은 것을 보고 하는 말일게다. '우선 다 제쳐두고 아버지 산소부터 가야지.' 한국가는 비행기표를 끊기 전부터 한 결심이었다.
"네, 그렇습니다."
청년은 입국 용지를 다시 한 번 훑어보더니, 내 여권에 도장을 찍어준다. 여권을 도로 받아 쥐는 내 손끝이 가늘게 떨린다. 여권에는 6년 반 전에 찍은 칼라사진이 붙어있다. 사진 속의 나는 힘없이 웃고 있다. 한 번 찍으면 십 년이 넘게 여권에 붙어 있을 사진이니까 웃는 모습으로 찍으라고 하던 사진사의 말에 억지로 지어보인 미소였다. 아버지의 마지막 사진도 돌아가시기 얼마 전에 찍은 여권 사진이었다. 그 사진 속에 담긴 아버지의, 모든 것을 체념한 듯한 표정. 그 위로 드리운 희미한 미소. 갑자기 가슴 한 골짜기가 아려온다.
"얘, 이번에 대만에 연수 갈 일이 있는데, 나 다녀올까?"
"그래요, 아버지, 답답한데 바람이나 한 번 쐬고 오세요."
아버지의 건강이 그토록 악화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몰랐던 나는 별 생각없이 대답했었다. 아버지는 당신이 중환자였다는 것을 아셨을까. 아버지는 출장에서 돌아온 후 몹시 수척한 모습으로 말했었다.
"얘야, 음식도 안 맞고 소화도 안 되서 고생만 했다."
해외 연수에서 돌아오고 나서 아버지는 곧 병가를 냈다. 그 때, 무리하게 출장만 안 가셨어도 좀 더 오래 사실 수 있었을텐데....... 그랬더라면, 지금 내 마음이 좀 더 편안할런지도 모르는데.....
여권은 6년 전부터 받아놓고 있었다. 해마다, '내년엔 꼭 한국엘 가야지.' 하면서 또 한 해를 넘기곤 했었다. 돈도 돈이었지만, 그보다는 마음의 여유가 없는 까닭이었다. '아직은......' '한 해만 더 있다가......' 그러면서 미루어오기를 몇 해 째던가. 그래서, 한국에 다녀왔다는 이곳 교포들을 만나면 부럽게 쳐다보곤 했었다. 그러던 내가 지금 이곳 김포에 와 있다.
나는 울면서 김포를 떠났었다. 배웅 나온 친구들과 웃고 떠들고 하다가 막상 떠날 때가 되니까 그렇게 서러울 수가 없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마치 도망이라도 가듯이 부랴부랴 떠났던 미국행이어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비행기가 이륙한 다음에도 울음은 그칠 줄 몰랐다. 하도 안 돼 보였던지 옆자리에 앉았던 아저씨가 '학생, 그만 울어요. 머리 아프겠어요.' 하며 나를 달랬었다. 그 때의 감성도 눈물도 다 말라버린 지금, 나는 중년의 여인이 되어 다시 김포에 와 있다. 고향을 찾아가야 한다. 더 늦기 전에.
번드리 가는 길
선산은 마을 교회 뒷산에 있다. 교회까지 들어오는 길이 말끔하게 포장되어 있었고, 누가 언제 닦아놓았는지 교회 옆으로 길이 나 있었다.
"묘를 파야혀. 그래야 집안이 다시 일어설 거구만."
산길을 오르는 내 귓잔등에 고모의 말소리가 들렸다. 고조할아버지와 고조할머니의 묘를 지금의 선산으로 이장해 온 다음부터 집안 어른들이 돌아가시기 시작하고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다는 얘기였다. 군내 유지였던 할아버지가 학교 지을 부지를 기증하느라고 신태인에 있던 고조부와 고조모의 묘를 연 다음부터 집안이 망하기 시작했다고 했다.
"신태인에 있던 묘를 여는디, 글씨, 허연 김이 쑤욱하고 올라오더란다. 그때, 정기가 다 빠져나간거여...... 아이고, 그때 이장만 안 힜어도, 집안이 계속 잘 되얐을 판인데......"
고모는 못내 아쉬운 듯, 긴 한숨을 쉬었다. 고모의 말대로 그 때 이장만 하지 않았어도, 우리 집안은 옛날처럼 잘 살았을런도 모른다. 우리 아버지는 우리 어머니 대신, 참한 색시를 만나서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제 선산은 아버지 옆 자리만 남기고 다 차 있었다. 친어머니도 새어머니도, 아버지의 옆자리엔 묻히지 못 할 것이다. 처복이 지지리도 없었던 불쌍한 아버지. 그래도 집안 어른들의 묘가 다 옆에 있어서 외롭진 않아보였다. 고조 할아버지와 고조 할머니, 증조 할아버지와 증조 할머니, 할아버지와 할머니, 작은 할아버지와 작은 할머니...... 흙에서 나서 흙으로 돌아가는 운명. 불현듯, 묘마다 솟아 있는 동그란 봉분이, 마치 분만을 앞둔 임산부의, 불러있는 배처럼 보인다. 한 세대는 가고 다음 세대는 오고...... 이 반복되는 삶의 윤회 속에 나는 지금 어디쯤 와 있는가.
아버지 생전엔 아버지의 손을 잡고 추석마다 이곳에 성묘를 왔었지. 선산 아래로 추수를 앞 둔 사각형의 논밭들이 내려다보인다. 아버지는 선산에 올 때마다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아버지는 당신께서도 이 선산에 묻힐 걸 미리 알고 계셨을까. 내가 묻힐 약속의 땅은 어디일까. 갑자기 아버지 옆 자리에 묻히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아버지 옆은 따뜻하겠지. 옛날 아주 어렸을 적처럼 아버지 옆에 누워 잠들고 싶다. 아버지가 살아계신 동안엔 언제고 편히 잠들 수 있었는데....... 나는 아버지가 심어놓은 백일홍 나무를 쳐다보았다. 백일동안 꽃을 피운다는 나무. 오십도 못 채우고 돌아가신 아버지. 철없는 자식 넷을 남겨두고는 차마 눈을 감을 수 없었던 아버지. 아버지가 숨을 거둔 후 누군가가 아버지의 눈을 감겨 드려야 했었다. 아버지, 아버진 왜 그렇게 일찍 돌아가셔야 했나요.
"야야, 올해는 니 딸년 데리고 왔다."
고모는 아버지 산소 앞에 멈추어 섰다. 나는 눈물이 핑그르 도는 것을 감추려고 애꿎은 땅바닥만 바라보고 있었다. 아버지를 보면 하고 싶은 말이 참 많았었는데...... 대신, 아버지 산소 위에 성글게 덮힌 잔디만 몇 번 쓰다듬어 보았다. 아버지 대신 내 옆엔 원이가 서 있다. 십 삼년 만에 다시 만나 보는 이복 동생이었다. 내 옆에 서 있는 원이의 모습은 젊은 날의 아버지 모습을 많이 닮아 있었다. 원이의 눈은 아버지의 눈보다 훨씬 작았지만, 짙게 난 눈썹은 아버지의 눈썹을 꼭 빼다 박아 놓은 것만 같았다. 입이 약간 앞으로 나온 것은 사진에서만 본 할아버지를 닮았다. 원아, 너는 아니?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널 많이 찾으셨다. 하지만 난 이 말을 입밖에 낼 수 없었다. 나중에 원이가 더 크면 얘기를 해 줘야지...... 성묘길 내내, 원이도 나도 내려온 앞머리카락를 간간히 쓸어 올릴 뿐, 아무 말이 없었다.
아버지의 아들
고모가 계란찜을 쪄주었다. 보름달같이 매끄럽고 예쁘게 생긴 계란찜. 조그맣고 동그란 투가리에 담긴 계란찜을 앞에 두고 원이와 밥상에 마주 앉았다.
"얘, 원아, 계란찜이 참 맛있게 생겼다. 나, 미국에선 전자 렌지에다 계란찜 많이 해 먹었는데, 이렇게 맛이 없다."
"난 그냥 가스 렌지에다 쪄봤더니 비슷하게 되던걸."
"그래애?"
그래, 원이 너도 계란찜을 좋아하는구나. 공연히 가슴이 저려왔다. '불쌍한 녀석' 하는 아버지의 음성이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정작 나보다 더 불쌍한 건 원이였다. 아버지는 그애가 열살 때 돌아가셨고, 나도 바로 그 다음 해에 미국으로 가서는 십 년이 넘도록 연락도 없이 지냈었다. 미국 살이가 힘들어서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바로 전에 집을 나간 그애의 어머니가 원망스러워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나, 네 어머니한테 감사하다. 나 잘 키워주셔서 고맙다고 말씀드려라. 단, 한 가지 아쉬운 게 있다면 아버지랑 끝까지 잘 살아줬더라면 하는 건데......"
나는 말꼬리를 흐렸다. 하지만, 원이도 알고 있었다. '그랬더라면 우리 아버지가 그렇게 일찍 돌아가시진 않았을텐데.' 내 입속에서 맴도는 한탄조의 후렴구를.
"엄마가..... 엄마가 잘못했어......"
원이는 제 어미의 잘못이 마치 제 탓이라도 되는 양 미안해 했다. '그래도 원이 넌 행복한거다. 네 어머니는 널 데리고 나갔잖니.' 하지만, 난 이 말을 그냥 속에서 삭여 버렸다. 대신, 원이의 옆 얼굴만 물끄러미 쳐다 보았다.
아버지. 아, 가여운 아버지. 아버지는 당신의 두 번의 결혼에 모두 회의적이었다. 원이가 떼어온 호적등본을 보면서 나는 씁쓸해졌다. 아버지는 내가 태어난 지 4년 반 후에야 나의 출생신고를 했고, 원이가 태어난 지 6년 후에서야 그애의 출생신고를 했다. 아버지는 결코 자식들의 출생신고를 몇 년 씩이나 미룰만큼 태만한 분이 아니었다. 호적등본 번역비와 공증료에 4만원이 들었다는 원이에게 나는 지갑에서 50불을 꺼내 쥐어주었다. 왠지 그렇게 해 주고 싶었다. 그러면서, 나는 가만히 원이의 흰 손을 내려다보았다.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 아버지의 손이 꼭 이렇게 생겼었지.
"원아, 난 네가 이렇게 내 옆에 있다는 게 실감이 안난다."
"...... 어떻게 하면 실감이 나게 해 줄까, 누나"
그러면서 원이는 내 손을 꼬옥 쥐었다. 언제나 따뜻하던 아버지의 손. 그애는 아버지의 손을 갖고 있었다. 갑자기, 시린 가슴이 계란찜처럼 따뜻해져왔다. 미국에 돌아가는대로 난 원이의 이민 수속을 시작할 것이다. '아버지, 잘 했죠?' '그래, 수고했다.' 아버지가 그 옛날처럼, 내 등을 토닥거려 주실 것만 같다. 원이의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 사이로 나는 아버지의 따뜻한 체온을 느꼈다.
원이는 더 이상 내가 기억하는 열 살 짜리 개구쟁이가 아니었다. 그애는 스물 셋, 지방 국립대학에 다니는 복학생이었다. 군대를 갔다와서 어른이 다 되었다며 기특해하는 고모의 말이었다. 고 삼 때부터 새어머니가 신병이 생겨 다니던 직장을 그만 두는 통에 원이가 아르바이트를 하며 학교에 다녔다고, 또 작년엔 서민 아파트 전세금을 마련하느라 일 년간 휴학까지 했다고 했다. 아버지가 당신 아들이 이렇게 고생하는 걸 알면 얼마나 속이 상하실까. 미국이라면 또 몰라도 한국에서.
사서도 한다는 초년고생 덕에 원이는 신중하고 또 생각이 깊은 청년으로 성장해 있었다. 원이는 아버지를 닮아서 깔끔하고 섬세하고 또 자상했다. 아버지는, 원이 속에 그대로 살아있었다. '아버지, 큰일을 하셨군요.' 난 원이를 보며 줄곧 아버지 생각을 했다. 원이에게서 십 삼년 만에 듣는 '누나' 소리. 원이가 날 '누나'라고 부를 때마다 고모를 '누님' 이라 부르던 아버지가 생각났다. 어쩌면 저렇게 목소리까지 아버지를 빼닮았을까. 내겐 십여 년의 세월 속에 그저 묻어두고만 살아온 그리움의 공백을 일주일간의 짧은 만남으로 메꾸어야 하는 다급함이 있었다. 아버지의 죽음에 연이어 형제들까지 미국으로 훌쩍 떠나버려서 그간 몹시 외로웠었다는 원이. 그애에게 난 어떤 존재일까. 난, 내가 열살 때 헤어져 열 아홉 살 때 다시 만났던 나의 친어머니, 내게 깊은 상처만을 안겨주고 또 다시 훌쩍 떠나버린 나의 생모를 생각했다. 나도 원이에게 또 다른 상처만 남겨주고 떠나버리게 되는 것은 아닐까.
"무슨 일 생기면 전화해, 알았지?"
원이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인다. 자식, 어쩌다가 이렇게 기가 다 죽어버렸을까.
"잘 있어, 원아. 건강하구."
원이에게 작별인사를 하는 내 눈에 눈물이 고인다. 이제 가면 언제 또 원이를 보게 될까.
"울지 마, 누나."
나는 나보다도 훨씬 커버린 원이를 한 번 꼭 안아주고 나서 차에 올랐다.
형제 초청은 10년이 넘게 걸린다고 했다. 십 년 후면 원이는 지금의 내 나이가 될 터인데..... 너무 늦지 않을까. 나는 나도 모르게 기인 한숨을 내쉬었다.
- 1997년 가을, 미국에 온 후 처음으로 한국에 다녀와서 쓴 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