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 철미의 이야기 /철미의 작은 소설

혁이, 내 친구

최철미 2013. 12. 9. 19:33


 오랫만에, 정말 오랫만에 만나는 혁이 앞에서 나는 할 말을 잊고 서 있었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까.     "살쪘네.  옛날보다."

 한참의 궁리 끝에 나온 첫 마디는 고작 이거였다.  혁이는 말없이 웃었다.  예의 그 수줍음.  난 그런 혁이를 좋아했다.  

 "잘 있었냐?"

 서울에 올라온 지 십여 년이 넘도록 여전한 혁이의 투박한 사투리.  내가 듣고 싶어하던 그 목소리 그대로였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며 내가 물었다.  

 "버스값이 얼만데?"

 "사백 삼십 원."

 토큰 하나에 80원 하던 기억이 난다.  13년 동안 물가가 다섯 배도 더 올랐다는 얘기구나. 

 "택시 기본 요금은 얼만지 아냐?"

 "천원 아니야?"

 "아냐, 임마, 이천원이다."

 '혁이가 이젠 농담도 할 줄 아네.'  나는 빙그레 웃었다

 "내 선물 사왔냐?"

 식당에 들어가서 앉자마자 어린 아이처럼 묻는 혁이에게 나는 두툼한 서류 봉투를 건네주었다.  혁이가 내게 보낸 편지 묶음이었다  

 "이걸 왜 도로 주는거냐?"

 혁이는 눈이 동그래져서 날 쳐다본다.   

 "그냥. 그냥 돌려 주고 싶어서 그래."

 내가 죽으면 그 누군가에 의해 그냥 버려질 것들이잖아.  그렇게 되기 전에 네게 돌려주고 싶어.  내겐 그만큼 소중한 거니까......  아버지의 유품을 챙기면서, 또, 동생의 유품을 정리하면서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니?  하지만 난 혁이에게 차마 이 말을 할 수는 없었다.  혁이는 담배를 피워문다.

 "내 흔적을 지우려고 그러는군."

 담배는 언제 배웠을까.  담배를 피우는 그의 모습이 무척 낯설다.  식당에서 나와 어디로 갈까하는 혁이에게 나는 학교에 가보고 싶다고 했다.  학교 정문 앞의 ㄱ ㅅ ㄷ 석 자는 계집, 술, 담배를 상징한다...... 혁이가 옛날에 내게 가르쳐 주었었다.  고로 이 교문을 통과하는 남자들은 이 세 가지에 다 통달해야 한다......  내가 혁이를 처음 만났을 땐, 혁이는 이 세 가지 모두와는 거리가 먼 모범생이었다. 지금쯤은 이 세가지 모두에 통달해 있을까.  어느새 우리는 학교 정문 앞에 와 있다. 학교 정문은 십 사년 전에 처음 보았을 때와 똑같이 높고 커다랗게 서 있다.  대학 본부, 학생회관, 작은 연못.  혁이는 나를 데리고 내가 다니던 영문과가 있던 인문대 3동으로 간다.  혁이는 대통령이 되겠다고 정치학과에 갔었다.....        

 "나 여기 오니까 있지, 다시 학교에 다니고 싶어진다."

 나는 휴학계를 내고 미국으로 갔고, 내가 미국에 있는 동안에 혁이는 내 대신 휴학계를 내주었다.  그리고 그는 편지에 썼다.  너 언제나 돌아올 거냐?  혁이가 졸업반이 되던 무렵부터 난 답장 쓰는 일을 그만 두었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로부터 십여 년이 지난 지금, 나는 다시 혁이 앞에 있다.   

 "미등록 제적이니까 복학하면 돼."

 "그래?"

 아, 다시 학교에 다니고 싶다.  아니, 다시 그 때로 돌아가고 싶다.   여기서 계속 학교를 다녔으면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  도서관엔 아직도 불빛이 환하다.  시험 때면 줄을 서서 자리가 나길 기다렸었지. 

 "너, 커피 좋아했지."         

 혁이가 도서관 앞 자판기에서 동전을 넣고 커피를 빼준다.  종이컵에 담긴 커피를 앞에 두고 도서관 옆 휴게실에 혁이와 마주 앉는다.  누군가와 이렇게 마주 앉아서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나눌 수 있다는 사실이, 내가 지금 미국이 아닌 한국에 있음을 실감하게 해준다.  

미국은 외로운 곳이었다.  비싸봤자 1, 2불이면 싫다고 할 때까지 부어주는, 천지에 흔해빠진 것이 커피였지만,  정작 이런 커피 한 잔이라도 얼굴을 마주 하고 앉아서 같이 마실 수 있는 벗이 그리웠다.  저마다 먹고사는 일에 바빠서 죽을 시간도 없는 이민 생활 자체가, 차 한 잔을 앞에 두고 정담을 나눌 만한 시간적 여유조차 허락하지 않는 까닭에,  또, 미국에 사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정서적으로도 각박하게 사는 까닭에, 서로 마음을 터놓고 얘기다운 얘기를 할 수 있는 정신적 여유조차도 없는 탓이었다.  게다가, 천차만별의 사람들이 모여 사는 까닭에 공동관심사가 될만한 화제 또한 찾기 힘들었다.  그래서, 미국에 가서는 나 혼자서 커피를 마셨다.  

 "네가 계속 여기서 학교를 다녔더라면, 우린 연애를 했을 거다, 안 그러냐?"

휴게실을 나와 도서관 앞 나무 벤치 위에 앉아서 혁이가 묻는다.

 "그래, 내가 미국엘 가지 않았더라면, 네 색시가 되었을 런지도 모르지."  

나는 나도 모르게 이렇게 대답해 놓고 멋 적어져서 피식 웃었다.  학생회관 앞에서 몇 명의 학생들이 모여 플래카드를 걸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랬더라면...... 너 꽤나 고생했을 거다."

 혁이는 예나 지금이나 솔직하다.  그래, 물론 고생은 했겠지.  혁이는 그리 넉넉지 않은 시골 양반 집의 장남이었다.      

 "혁이 너도 꽤나 불행해졌을 거야." 

 나도 혁이처럼 솔직해져야지.  아마 넌 내가 얼마나 힘들게 살아왔는지 모를 거야.  그러나, 혁이 너에게 그런 얘길 하고 싶진 않아. 혁이는 언제나 좋은 친구녀석이었다.  서로에게 좋은 친구가 되기 위해 연인이기를 사양했던 그런 사이, 우리는 그런 사이였다.  내 스스로 빚어낸 자격지심에서였을까, '넌 언젠가 더 좋은 사람을 만날 거니까' 하며 혁이와의 사이에 늘 적당한 거리를 두고 지냈었다.  가까워진다 싶으면 저만큼 얼른 물러서야만 마음이 놓이곤 했었다.   의식의 저 편에서, 내게로 다가오곤 하던 너를 자꾸만 밀어내곤 하던 그건 무엇이었을까.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한번도 사무치게 그립다거나 못 견디게 보고 싶어한 적은 없었다.  우린 정말 손도 한 번 잡아본 일이 없었다.  그렇지만,  갑돌이와 갑순이도 아니면서 보름달이 몽긋하게 떠오르는 밤이면 가끔씩 생각나는 혁이였다.  혁아, 네 머리 위를 비추던 저 달이 열 여섯 시간 후인 지금은,  여기 나의 하늘에 떠 있다......  보름달이 뜨지 않아도 감청색으로 물든 밤하늘을 보면 문득 생각나곤 하는 혁이었다.  짙푸른 캘리포니아의 밤하늘을 한 꺼풀씩 걷어내면 그 속에 녀석의 수줍은 미소가 숨어 있을 것만 같은 착각이 들곤 했다.  아주 가끔씩 꿈에 나타나는 혁이는 감청색 윗도리를 걸치고 있는, 언제나 옛날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녀석을 생각하면 차를 마실 때처럼 가슴이 따뜻해왔다.  혁이와 난 형제간도 아니면서 닮은 구석이 많이 있었다.  그래서 난 다른 친구들보다 녀석을 더 좋아했는지도 모른다.   가끔씩, 아주 가끔씩, 만약 내가 혁이와 연애나 결혼을 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싶은 때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뿐이었다.        

 "하지만, 나, 너 좋아했다." 

 하지만, 이제 너무 늦어버린 고백이었다.  우린 지금 마주 보고 서 있는데도,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구나.  하지만, 난 지금 네가 내 앞에 이렇게 서 있다는 사실만으로 감사하다.  한때, 혁이를 좋아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난 누굴 사랑한다는 무책임한 말따위는 절대로 입 밖에 내지 않을 것이다.  혁아, 넌 아니?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작업인지를.  

 혁이는 사 년 반이 넘도록 사귀던 여자 친구가 얼마 전에 절교를 선언했다며 못내 속상해했다.  나는 그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그러나, 담담하게 들어주었다.  얘, 사 년 반이면 긴 시간인데, 다시 한 번 잘 해 봐라, 하는 충고까지 해 가면서.  혁이는, 그러는 내가 마치 제 누님같다고, 그래서 마음이 편하다고 했다.  그래, 혁아, 우린 그저 이렇게 편안한 친구로 남기로 하자.  친구. 네게 좋은 친구로 남고 싶다.  친구, 서로에게 아무 대가를 바라지 않는,  허접스러운 감정으로 밀고당기지 않아도 되는, 막연하고도 편안한 사이...... 구태여 사랑과 이별로 단정하지 않아도 되는, 그러나 서로에게 길들여져 있어 편안한 사이......

 그간 너무 많이 변해 있는 서울 거리를 혁이와 함께 걷는다.  인생은, 끊임없는 과도기의 연속인지도 모른다.  나는 어디를 향하여 가고 있는가.  혁이는 어디로 가고 있을까.  인생은 폭이 좁고 가파른 나선형 계단, 한 번 발을 잘못 디디면 밑도 끝도 없이 추락할 수 있는, 지옥과 천국 사이에 횡으로 놓인 계단.

 "한국에서는 내가 네 보호자다." 

 혁이의 '보호자' 소리. 낯설지만 듣기 싫지는 않다.  '보호자' 없이 살아온 세월이 너무 길었는지도 모른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홀로 서기.  지금 나는 잃어버린 나를 다시 찾기 위해 이곳에 돌아와 있는지도 모른다.  혁이의 넓은 어깨가, 아니, 누군가가 지금 잠깐만이라도 내 옆에 있다는 사실이, 나의 마음을 든든하게 한다 .

  "조금만 앉았다 가자. 뭐 마실래?"

 로타리까지 나를 바래다준 혁이가 동네 어귀 편의점 앞에서 내게 묻는다.   조금만, 조금만 더 너와 있고 싶다.  조금만 더 너를 바라보고 싶다.  너를 바로 옆에 두고도 멀리 떨어져 있는 나.  그래, 조금만 더 있다가 헤어지자.  내일이면 난 다시 한국을 떠나야 한다. 갑자기 혁이가 아저씨같이 느껴진다.  

 "딸기 아이스크림."

 편의점에서 나오는 혁이는 한 손엔 딸기 아이스크림을, 다른 한 손에 캔맥주를 들고 있었다. 

 딸기 아이스크림은 알맞게 달고 시원했다. 

 "너. 언제 또 나올래?"

 "내년 추석 때 또 올께."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내년엔 나오지 못할런지도 모른다.  내년에 나오게 되더라도 혁이에겐 연락을 하지 않을런지도 모른다.  

 "너 장가갈 때 연락해라.  와서 축가라도 불러줄게."

 혁이와 혁이의 각시를 위해 무슨 노래를 불러주어야 할까.    

 




(1997 가을에 쓴 글.  '혁이'는 지금도 여전히 나의 고마운 친구다. 아주 예쁜 아내와 아들하나 딸 하나를 둔 성실한 가장이다.  비록 축가는 불러주지 못했지만, 혁이 가족의 행복과 건강을 위해 기도한다.  혁아, 이제 담배 좀 끊고, 와이프랑 애들 데리고 가까운 성당에라도 다니렴.  신앙을 갖는다는 것처럼 중요한 일은 없단다......  물론,  친구의 본명은 아니다.  무슨 이름을 쓸까 하다가 빛날 '혁(赫)' 자를 골랐다.  웬지 그렇게 하고 싶었다......)     








'딸 철미의 이야기 > 철미의 작은 소설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약속의 땅  (0) 2013.12.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