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운서, 최세훈/아버지의 책, 증언대의 앵무새

연주와 송신의 메카니즘 [안테나 밑 유사]

최철미 2015. 7. 4. 15:37

□ 연주와 송신의 메카니즘

예광탄이 밤하늘을 찢고 대포가 야수처럼 으르렁댔다. 6월 28일 오전 0시…초침과 더불어 적은 가까이 왔다.
국방부의 통제 하에 정훈장교들의 시낭송과 음악을 흘리던 HLKA는 적재정량 3톤 반의 트럭에 실렸다.
AM송신기를 분해하던 엔지니어는 연희송신소에 마지막 전화를 걸어 어디서든 전파를 발사할 테니 잘 받아 달라며 울먹였다.
유랑의 길에 비는 내렸다.
배가본드가 한강을 넘은 다음 승냥이처럼 달겨든 파르티잔의 총검이 정동 마루터기 어둠 속에 번뜩였다.
오전 3시, 마탄의 사수들이 방송국을 수색하던 운명의 H아워, 국방부 보도 장관 김현수 대령은 황망히 달려오며 문을 박찼다. 철수명령을 안고 온 것일까? 아니면 비에 쫓긴 것일까?
『정지! 누구냐?』
피에 주린 자동소총 앞에 뛰어든 그 저항 없는 표적에 무조건 응고될 때 라디오는 그러나 살아 있었다.
『여기는 서울중앙방송국입니다. HLKA 서울 KOREA…』
연희송신소 최후의 기술자는 비상용 레코드를 걸며 서투른 콜 싸인을 넣고 있었던 것이다.
이 전설의 히로 이성실은 부산에서 감전순직, 6.25에 기적적으로 생환한 목숨을 고압선이 불살라 그의 무용담은 영원한 미스테리로 남았다.
방송국은 송신소와 연주소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 일반적인 시스템, 공격목표에 연희송신소를 포함하지 않았던 적의 미스를 그 전설은 비웃고 있다.
이 아이러니는 4.19에 되풀이 될 뻔 했다.
민권탈환의 전위였던 일단의 학생 데모대가 남산 연주소에 밀어닥쳤을 때 방송국은 비상대책을 세웠다.
마이크로폰을 빼앗기면 송신소에서 전파를 끊어 버리도록 최후의 방어선을 구축한 것이다.
그러나 비조직, 비폭력의 학생들은 데모광경을 중계 방송하라는 천진난만한 요구를 내걸다가 뿔뿔이 흩어져 갔다.
군인들의 삼엄한 피켓트 라인이 아니었더라도 그 날 사자들의 포효는 방송되지 않았을 것이다.
5월 16일의 이른 아침, 1개소대 병력의 헌병이 간조처럼 물러서고 공정대가 만조로 들이닥쳐 방송국을 장악한 뒤 철모를 쓰고 온 혁명주체들은 참으로 친절했다.
5.16 1주년을 회고하는「주간방송」의 좌담에서 박종세 아나운서와 김기주 기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金=그런데 그 날의 혁명군이 어떻게 친절했던지 저는 착각을 일으켰어요. 처음에 헌병들이 왔다가 다시 국군들이 와서 우리 방송국을 지키러 온 건지 알았어요. 어떻게나 친절한지요. 그래 제가 아마 지금 생각하니까 이석제 대령 같은데 그 분한테 이제 다 쫓겨갔습니까? 이런 얘기를 했어요(일동 웃음) 어떻게나 친절한지요. 그랬더니 그 분이 껄껄대고 웃더군요(일동 웃음)…』
그 친절에 보답해서 방송의 메카니즘을 친절하게 설명했다.
『朴=저는 방송을 하면서도 불안한 것이 있었어요. 여기서는 방송을 하지만 송신소에서는 송신을 하지 않으면 어떻게 하느냐 하는 거예요.
金=그것은 제가 얘기를 했지요. 여기는 이제 준비가 다 됐는데 송신소에 갔느냐 하니까 아직 안 갔다는 거예요. 그러더니 김종필 씨가 뛰어 나가서 찦차의 무전으로 연락을 하더니 도착을 했다고 하더군요.』
연주와 송신은 기름과 심지, 마침내 혁명의 등불은 광휘롭게 타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