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픈 언니.
미국에 온 지 벌써 사흘째야. 그동안 잘 있었겠지?
이 곳 캠블은 날씨도 화창하고, 거리도 깨끗하고 조용해서 참 좋아.
한국 사람이 30,000 은 살아서 그런지 한국 식당, 한국 교회도 많아.
나는 보살님댁에서 상미라는 5살 짜리 꼬마애랑 친해졌어. 영어도 걔한테서 많이 배우는 중이야.
걔는 나한테 '너' 라고 하지만, 내가 언니 노릇 톡톡히 해.
귀엽고 한국말도 잘 해. 근데, 미국애들이 따돌려서 그런지 친구가 없대.
나는 걔한테 우리 나라 동요도 가르쳐 줬어. 곧잘 따라불러. 하지만, 아직 5살이라 나는 피곤하기만 해.
첫 날은 바빠서 생각할 겨를도 없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나 한국이 그리워.
말도 안 통하고, 길도 모르고, 그렇다고 누가 친절히 가르쳐 주는 것도 아니고......
어제 오늘 방 안에 틀어 박혀서 편지 쓰고, 잠이나 자고 그러면 끝이야.
엄마는 새벽 4시에 나가서 오후 4시 쯤 들어오는데 별로 마주 볼 시간이 없어.
이곳 생활은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 그리 재미 있는 곳이 아냐.
엄마나 선생님, 친한 친구들한테는 말 안 했지만 너무 외롭고 쓸쓸해.
나는 단란한 가정을 꿈꾸며 새로운 시작을 기대했는데, 되돌아 가고 싶어. 엄마는 친엄마 같지도 않고......
언니야, 보고 싶어. 사흘 내내 입맛을 잃어서 먹는 둥 마는 둥 거르는 끼니가 더 많고, 집안은 집안대로, 나는 나대로 마구 흐트러져 엉망이야. 집이라도 깨끗하면 마음이나 잡을텐데, 어젠 밤새 정리했는데 아직 안 끝났어. 언니라도 빨리 와야할텐데, 가슴이 답답하고 울고만 싶어.
언니한테 이런 편지 보내서 미안하지만, 지금은 내가 뭐라해도 들어줄 사람이 없어. 우리집은 아담하지만 어딘가 무서워. 어두운데다가 담으로 막혀서 그런가 봐. 월요일부터는 학교에 가는데, 빨리 가서 외로움을 잊고 싶어.
언니야.
나 아빠 보고 싶어 죽겠어. 그냥 죽어버릴까 하다가도
"안 돼. 죽더라도 한국 땅에서 죽어야지."
한단다. 엄마한테는 절대 비밀이야. 괜히 마음 쓰게 하면 골치니까.
언니, 그럼 은행에 가야 돼.
안녕. 그리고, 빨리 와, 응?
Yoon
1983 년 겨울 미국에 와서 얼마 안 되어 찍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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