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들의 글모음/작은 딸, 윤경이의 편지

1984년 봄, 4월 20일

최철미 2014. 6. 26. 12:38

언니야!
보고 싶었어. 무지무지. 편지 쓴다 쓴다 하면서도 알잖우? 나 게으른 것.
윤경인 그동안 잘 있은 것 같애. 가끔가다 좀 미치기는 해도 - 이를테면 하루 종일 운다거나, 집에 들어가기가 싫다거나, 공부 안 한다거나...... 어제두 나 아팠어. 학교서 조퇴하고 집에서 누워있었어.
이젠 다 나았어. 우리 월례 고사 봤어. 나 몇 등 했는 줄 알아?
집에선 공부를 못 하겠어. 주된 원인은 아줌마 잔소리야. 공부하는 것 지켜보니깐 더 거슬려서.
그리고, 아이들 떠드는 거. 공부할 데가 마땅치 않아. 그래서 결국 9등...... 크 - .
노려보지 마. 나 공부 하나두 안 했어. 정말 면목 없어. 미안.
화낸 얼굴 짓지 마. 웃는 게 이뻐. 시집두 못 가면 나 책임 안 져.
참 오래간만에 띄우는 편지라서 그런지 정말 쓸 말이 없어. 웬지 어색한데. 안 그래?
엄마한테 편지 왔어. 뻔하잖우. 뭐 그런 내용...... 읽지도 않고 찢어버렸어. 휴우.
나 요즘 아무하고도 편지 안 해. 아니, 그 쪽에서 아주 안 오던데, 뭘.
생일 날 온다매? 오지 마. 안 와두 돼. 그냥 큼지막한 걸로 소포나 부쳐. 낄낄.
아니, 농담이 아니라 왔다갔다 하면 피곤하잖아?
이제부턴 편지 자주 쓸게. 응? 믿어 줘요.
참, 칭찬해 주라. 난 요즘 교회 빠짐없이 잘 다녀. 수요일 저녁 예배까지. 교회 가서 기도해.
빨랑 전학 가게 해 달라구. 이젠 지긋지긋해. 하숙 말야. 후 -.
서울에나 가서야 마음 잡고 공부할 것 같아. 지금은 싱숭생숭. 뒤숭숭 하고...... 잠자리도 불편하구.
언니, 그럼 나 갈 때까지 안녕.
윤경이 눈물나서 그만 쓸래.

윤경

나 머리 유행 스타일로 깍았다. 되게 이쁘고 귀엽대.
보고 싶지? 나두 빨리 보여줬음 좋겠다.
안녕! 보고 싶을 거야. 정말루. 눈물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