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운서, 최세훈/아버지의 책, 증언대의 앵무새

온고이지신 [고유명사의 입술]

최철미 2015. 6. 14. 08:30

□ 온고이지신

「버라이어티 극장」이라는 와이드·프로그램에 출연한 신 카나리아는 사회자의 귀를 따갑게 쏘았다.
『내 이름 좀 먼저 불러 달라구요!』
연조에 민감한 얄팍한 여심…출연자 소개는 남존여비가 아니지만 선남 후녀가 관례였다. 서열을 따지는 가요계의 대 선배에게 고개를 끄덕이던 사회다의 눈에는 그녀의 후배들이 나중 난 뿔처럼 우뚝해 보였다.
그 날 이춘희의 무대의상은 순백의 바탕이었으나 세탁을 오랫동안 보류한 것 같았다.
정염으로 그슬린 것은 아니었는지….
『미스 리도 이런 것 입나?』
때가 묻었다는 아이러니로 동의를 구하자 순번을 기다리던 신인 가수 이미자는 코를 벌렁대며 다음과 같이 대꾸했다.
『드레스 말이에요? 저도 있어요. 다음번엔 입고 나올까요?』
천재 소녀가수로부터 인기 가도를 달려온 박재란은 약간 나르시스 기미, 창경원의「봄맞이 쇼」에 이 톱·싱어가 출연했을 때 아나운서는 살풀이의 찬스를 포착했다.
그날의 가설무대는 유난히 높아 20계단, 상춘객들이 각선미 콘테스트를 할 만큼 솟아 있었다. 경음악 순서가 되었을 때 사회자는 악동처럼 싱긋 웃었다.
『다음에는 영화〈천생연분〉의 히로인으로 간택된 박재란! 맹꽁이 타령의 힛터 박재란! 백만 팬을 가진 가희 박재란의 노래…』까지 외쳤을 때 하이힐 소리가 또각또각, 가파른 계단을 조심스레 밟고 오른 박재란은 자기 차례인 줄 알고 입술을 축였다.
『…를 보내드리기 전에 경음악 연주입니다.』
상춘객은 가가대소, 도망치는 다람쥐처럼 푸레스토로 계단을 내려간 박재란은 벚꽃 그늘에 몸을 숨겼다.
「봄맞이 쇼」가 끝난 다음 세차게 꼬집힌 아나운서의 팔뚝에는 창경원의 나무보다 더 붉은 벚꽃이 오래도록 피어 있었다.
「대전발 0시 50분」의 안정애 양은 가요 콩클의 초대가수로 출연해서 온고이지신.
『심사위원들이 성적을 집계하시는 동안 이 주일의 케스트·싱어 안정애 씨를 모시겠습니다.』
1초 2초 3초…아니 1분 2분 3분…대기실의 문을 왈칵 열었으나 가수는 오리무중, 청중석은 소연해졌다.
수색 자가 된 아나운서는 복도로 뛰쳐나가「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처럼『안정애씨!』『안정애씨!』외쳤으나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의 메아리, 담당자일동이 창백해졌을 때 숙녀용의 문이 드르륵 열리며 히쭉 웃고 나왔다. 안정애는.
「대전발 0시 50분」은 급행이었나? 완행이었나?
안정애양의 온고의 주소는 JODK.
창 너머로 출연자를 기다리던 30여 년 전 7순의 노인 한 분이 방송시간에 겨우 맞춰왔으나 신사용으로 급행했다.
철학하는 시간은 길기도 했다. 빨리 마치시라고 독촉할 수도 없고 공백상태를 지속할 수도 없어 불가불 미봉책을 썼다.
『연사는 방송국에 와 계십니다마는 불가피한 사정으로 지연 되겠습니다. 잠시 동안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 불가피한 사정을 안정애가 30여년 후에 지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