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운서, 최세훈/아버지의 책, 증언대의 앵무새

퇴화하지 않는 발자욱 [고유명사의 입술]

최철미 2015. 6. 14. 08:33

□ 퇴화하지 않는 발자욱

임방울이 지금은 불타 없어진 원각사에서 독창회를 열었을 때 그의 판소리는 전국에 메아리졌다.
이미 노경에 들었으나 완벽한 기교 난숙한 역량은 해지기전 한 시간처럼 반짝 빛났다.
그의 폐활량은 후진들의 족탈불급, 아나운서에게도 부러운 것이었다.
휴게시간의 인터뷰에서 국창은 열네 살부터 흥부전을 배웠던 쓰라린 판소리 수업의 얘기를 뚝배기 깨지는 목소리로 들려주었다.
『전국의 창극조 팬에게 인사말씀을 해주시겠습니까?』
임방울은 당황하며 벌떡 일어났다.
『나 후딱 갔다 올팅게…』
무대 뒤로 토끼사냥 하듯 쫓아간 노인네는 돋보기 한 마리(?)를 잡아왔다. 노란 테의 볼록렌즈를 코허리에 떠억 걸칠 다음 그는 프로그램에 인쇄된「인사의 말씀」을 떠듬떠듬 읽어 내려갔다.J
『내 이제 늙었으나…우리 예술의 우수성과 독자성을…끝까지 선양하고…수호하려는 결심으로…살아왔습니다….』
문자 쓴 긴 인사 말씀을 낭독한 다음,
『판소리 보다 되게 어렵네.』하면서 그 살짝 곰보의 인간문화재는 파안을 했다.
『한 시간 정도의 긴 연설은 당장에 등단한다. 20분정도면 두 시간의 준비가 필요하다. 5분 같으면 하루 종일의 여유를 달라.』고 했던 윌슨의 말이 잘못 이해되고 있는가?
마이크로폰 앞에서는 수사 학도가 되기 쉽다.
그러나 10년 전 친선사절로 우리나라에 온 외국인 크라렛트 박사는 한국의 첫 인상을 묻는 인터뷰에『30분밖에 되지 않아 잘 모르겠습니다.』라고 간결하게 대답했다.
외교관답지 않은 그의 단정에는 덮어놓고『원더풀!』을 남발하는 사람들에게서 느끼는 위화감이 없었다.
진선미의 전달자 라디오의 연치는 한국에서 어느덧 40년…5분의 2세기 전 신비롭기만 했던 줄 없는 전화는 오늘 대중의 판단 적 측면을 창조 지배하는 강력한 힘을 가진 무기로 발전했다.
여러 갈래의 관사 밑에 방송에 참여한 고유명사들…
그들의 입술이 쓴 역사는 조수에 씻긴 물새 발자국처럼 희미하지만 오래도록 풍화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