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운서, 최세훈/아버지의 책, 증언대의 앵무새

시보를 분기점으로 [말의 화가]

최철미 2015. 6. 14. 08:35

□ 시보를 분기점으로

1926년에 일본은 중등학교 야구 대회의 경과를 로컬로 보도하다가 다음해에 으오사까에서 최초의 실황 중계를 시도했고 1928년 11월에 이르러 전국 중계방송을 실시했다.
조심스러운 에스커레이션이라고 할까? 우리나라에서는 JO아가 창설된 해 6월 18일부터 5일간 일본인의 국기인 씨름 실황중계를 처음 실시했고 그해 가을 처음으로 잔선 야구쟁탈전 유선 중계가 있었으며 다음 해 8월 합동 중등학교 야구대회 실황을 중계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스코어를 대는 정도의 실험적인 것으로 그 전달 기술은 뎃상에 지나지 않았나 여겨진다.
또 특별 배전이 있었을 리도 없다.
1928년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제9회 올림피아드에서 3단도의 오리다, 200미터 평영의 쓰루다가 우승했는데 이 밭 전자 붙은 일본 선수들과 코치를 초청한 특집 방송이 기획되었다.
쇠위 심전개발을 위한 PR이었을까?
JOAK가 JODK에 입중해서 식민지의 밤하늘을 로오교꾸로 물들이자 일인들은 유명한 조경 전을 중계하라고 성화해서 소사 수신소에서 전적을 듣고 이를 속보했다.
일본인 우선의 편성 방침으로 한국인 3대 일본인 7의 비율이었으니 한달에 1원도 내기 아까운 도청 자가 가입자의 4배니 되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3.1운동으로부터 10년 후 1929년 3월말 현재 야구중계는 3회, 씨름 중계는 5회를 기록했고 30년대에 들어와서는 일본씨름, 야구, 육상경기 등의 중계방송이 활기를 띠워 10월 말까지 야구는 70회에 이르렀다고 하나 궤도에 진입하기에는 먼 기리에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초심자의 열중은 무서운 것, 시즌에는 거의 메일처럼, 일요일에는 더블·헤더를 넘어서 트리블·헤더의 7시간 동안을 혼자서 중계한 슈퍼·맨도 출현했었다.
최초의 우리말 스포츠·캐스터는 박충근 씨, 법전에서 야구와 축구의 교내 선수였던 이 활동가는 럭비 중계의 톱을 끓었고 조선 권투 구락부 O.B부싱을 배우며 처녀지를 개척해 나갔다.
링 위에서 일본 선수의 목숨을 앗은 살인보비에 대한 복수전이 벌어졌을 때, 도전자 다가·이찌로의 이빨이 보비·웰스의 펀치에 무너져 핏방울이 옷에 튀던 시합중계가 가장 인상적이라고 박충근 씨는 술회하고 있다.
약간 「사아드」취향이신가?
한국인 관중들은 그날, 일본 선수를 제쳐 놓고 비율빈 선수를 응원했는데 피압박민족의 울분의 카다르시스는 일제도 막을 수 없었다.
언어의 혼합 이라기보다는 혼돈에 가까웠던 단일방송이 시보를 분기점으로 둘로 갈라진 1933년, 2중방송의 보도 교양 프로그램에는 레일을 깐 듯 평행적 전달방식이 채택되었다.
세계 공통어인 양악은 아나운서만 따로 놓고 같은 시간에 방송했고 스포츠 중계도 두 개의 마이크로폰 앞에서 한국어와 일본어 아나운서가 각각 동시방송을 했으니 교차되지 않는 이 평행선은 내선 일체를 비웃는 아이러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