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운서, 최세훈/아버지의 책, 증언대의 앵무새

세 개의 십자가 [말의 화가]

최철미 2015. 6. 14. 08:37

□ 세 개의 십자가

2원 방송이 성행하던 1939년 7월 세계 1,2위를 다투던 농구단 카나디안·웨스턴팀이 우리나라에 원정했다.
아나운서 1년생인 이 현 씨는 최초의 농구중계, 맨 처음의 나이터 중계, 그리고 처녀중계방송이라는 세 개의 십자가를 오직정열 위에 짊어지고 선수생활의 경험 하나를 지팡이 삼이 서울 운동장의 특설 야간 코트에 나갔다.
전보전은 45대 49, 전연전은 23대 26으로 석패했지만 전조선-올·코리어·팀은 29대 27, 한 꼴로 박빙의 승리를 거두었던 그 빅·게임 중계는 야간 경기이기 때문에 더욱 힘들었다. 황금과 같은 밤의 30분, 겟세마네 동산의 시험에 이겨낸 그는 총리대신이나 된 것처럼 감격했었다고 언젠가 회고의 자리에서 말했다. 그러나 그가 단파사건의 피의자로 격하된전후, 젊은이들은 국제정치의 스포츠인 전쟁에 총동원 되고 방송국은 군가 연주소가 되었다.
미군이 「바다의 승리」를 거둔 1945년, 해방을 경축하는 집회가운데 가장 순수했던 종합 체육대회가 10월 7일부터 5일간 열려 스포츠도 사슬에서 풀리자 다음 해에는 각종 경기의 제1회 선수권대회와 3.1절과 8.15기념 체육대회가 개최되고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경평 대항전(축구·아이스학키)과 연보 전(축구·농구)도 부활했다.
각방으로 졸라매던 다라에는 바다에 놓여 진 물고기와 같은 자유가 부여되었고 스포츠·캐스터는 다시 그라운드의 우상이 되었다.
『스트라이크! 한복파안! 암빠이어 한쪽 손을 번쩍 들어 스트라이크를 선언했습니다.』
야구중계의 1번 타자였던 낮은 톤 위엄 있는 목소리의 윤길구 씨.
심판 뒤에 앉아 있던 그에게 야구왕 이영민 씨는 추방령을 내렸다.
백·넷트도 없었고 올라앉을 스탠드도 마련되지 않은 때였는데 미아처럼 어디로 헤매라는 것이었는가? 그러나 지방 출장을 하면 「 」라는 플랜카드가 나붙었다.
진귀한 플레이가 많았던 그 굳·올드·데이에 윤길구 씨는 용어 순화에 앞장서,
『알을 깐다(패스트·볼)』『땅볼(그라운더)』『코를 댄다(뻔트)』를 발명해 냈다.
강문수, 이진섭씨가 데뷔한 뒤 낭독조의 인기아나운서 팽진호 씨가 등판을 간청했다.
윤 감독이 릴리프로 내보낸 2군의 미스터 팽,
『쳤읍니다! 뽈은 푸, 푸아……파울 볼.』
『푸른 하늘에 은선을 그리면서……푸른 하늘에 은선을 그리면서……』
얼마나 다짐했던 명대사였던가, 그러나 「센터」로 날아가야만 편리했을 백구는 포물선을 그리며 라인 밖으로 급전, 낙하, 따라서 『푸른 하늘』이라는 시는 『푸아……파올』로 굴절해 버리고 말았던 걸이다. 그리하여 팽 선수는 스트렄 아웉!
일장기 말살사건으로부터 12년이 지난 1948년 7월 태극표지와 KOREA를 가슴에 아로새긴 한국대표단은 유사 이래 처음으로 피 흘리지 않는 민족투쟁의 광장으로 나아갔다.
제14회 런던 올림픽. 67명의 데리케이션과 함께 민재호 씨가 파견되었다. 첫 해외진출 아나운서인 그의 유창한 목소리는 인도를 경유하는 동안 히말라야산맥이 빨아들였는지 분명치 않았으나 게임에는 이기고 승부에는 졌던 권투 중계만은 확연히 들렸다.
종합성적 24위, 그러나 7월 30일 11시 45분을 기점으로 한 심야의 올림픽 중계방송은 한여름 밤의 꿈을 오륜으로 수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