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운서, 최세훈/아버지의 책, 증언대의 앵무새

오늘도 명랑하게 [고유명사의 입술]

최철미 2015. 6. 14. 08:31

□ 오늘도 명랑하게

등사판으로 밀어낸 필경체가 눈에 익은 성우들에게 수동식 복사기로 찍어내는 순 한글 타이프 글씨는 돋보기를 써야 할 만큼 아른거렸다.
상용한자를 제대로 익힌 타이피스트도 드물었고 프린트 잉크는 극본의 대량생산 탓인지 늘 빛이 바래 있었다.
『심화봉의 첩이가 담을 넘어 간다.』는 대사가 매끄럽게 on AIR된 것을 지적하면서 극작가 김희창 씨는 개탄한 일이 있었다.
「명랑소극장」인가 하는 코미디에 출연해서 처음으로 이 한글 타이프 대본을 손에 든 막둥이 합죽이 콤비는 줄곧 낭독의 경지를 헤매고 있었다.
만삭의 부인을 위로하는 장면에서 김희갑 씨는 다음과 같이 읽어버렸다.
『아암 교태를 잘 하도록 해야 하구말구!』
캐스트와 스탭은 일동 폭소, 녹음은 NG였다.
복혜숙 할머니가 개입해서 또 한 번 웃겼다.
『그러니깐 두루 뱃속에 든 아이가 요렇게 양귀비 흉내를 내라구?』
실눈을 뜨며 몸을 비트는 이 연기파의 표정에서는 노령을 읽을 수 없었다.
교태가 아니라 태교, 글씨를 거꾸로 읽은 합죽이는 대머리를 벅벅 긁었다.
천하무적의 후라이·보이에게도 무서운 것은 단 하나, 밝고 쾌활하다는 뜻의 낱말이다.
「오늘도 명랑하게」라는 DJ를 맡은 이 희극배우는 타이틀의 발음에서 언제나 고전을 했다.
「명·랑·하게」의 거듭되는 이응받침이 힘들어 그는 아침마다 명태 알을 배급했던 것이다.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십니까?… 그럼 오늘도 명란하게! 빠이빠이!』
송해 박시명이 버라이어티 쇼에 출연했을 때 윤리위원회가 두려웠던 방송국은 이들의 개그를 타자된 스크립트로 규제하려했다.
이 익살 콤비의 한쪽이 자기 집 개 자랑을 늘어놓자 다른 한쪽이 퉁명스럽게 반박했다.
『그거 명태가 아니라 도태로군…』
명태가 아니라 도태? 아나운서실에는 항의 전화가 걸려왔다.
『뭐 잘못된 것 아니오? 똑똑히들 하시오!』
옳은 말씀, 잘못은 먼저 타이피스트의 눈이 저질렀다.
「개 犬」에 붙은 사마귀를「큰 大」짜 가랑이에 끼워「클 太」로 보았으니「명견」은 북어가 되고「도견」은 아예 없어질 번했던 것이다.
눈이 나쁘지 않고 오히려 총기 어린 송해 박시명의 명태 콤비는 오늘도 사람을 웃기는데 근시안의 타이피스트는 도태되어 없다.
한동안 이 버라이어티쇼의 레귤러였던 백금녀가 지리산 도벌을 토벌로 읽은 시대착오는 문맥이나 통했지「그것」을『그놈』「내버렸다」를『내깔겼다』라는 식으로 방언과 비어를 범벅이며 아메리칸 잉글리시의 권위자라 뽐내는 한국인 로버트 박은 그의「영어·쟉키」에서 적반하장을「적장하반」이라고 놀라운 한문 지식까지 동원했다.
도둑이 오히려 매를 드는 것이 아니라 도둑 매를 거꾸로 든다…?
그런 도착과 무리의 영어를 코미디언들은 즐겨 썼다.
『홧스 메라 유!』
살살이 서영춘이 아직 일류가 되기 전에 남용하던 부로큰.
어느 날의 버라이어티쇼에서 그는『요게 바로 유머틱 이라는 거다.』하면서 유머러스하지도 않은 결말을 썼다.
1964년 8월 2일은 육체파 서애자 배우에게 있어 기념할만한 날인지도 모른다.
난생처음「영화음악실」의 스페시얼·게스트로 초빙되어「영화음악해설연습실」을 특설한 날이기 때문이다.
「해녀」와「쿠오·봐디스」를 다룬 그날의 자키에서 그녀는「나포링…소피안·로랭…카루릉·포딩…쿠바지스」등의 새 외래어 발음법을 창조한 다음 자신이 머물러야 할 주소「성좌」를『성탄』이라고 내뱉었다.
무용가의 두뇌는 다리에 있다는데 그래머·스타의 두뇌는 나변에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