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운서, 최세훈/아버지의 책, 증언대의 앵무새

지금 막이 오르고 있습니다 [현장의 메아리]

최철미 2015. 6. 14. 08:44

□ 지금 막이 오르고 있습니다

가극「파우스트」가 우리나라에서 초연되었을 때 중계방송은「메피스토페레스」의 저주를 받았다.
지휘자의 등단, 도입부의 음악이 흐르는데 담당 아나운서는 현장에 없었다. 보조로 나온 김 아나운서는 강습을 마치고 아직 일기예보도 하지 않는 신병, 첫 전투에서 소대장을 잃은 꼴이 되어 그 엄청난 의무를 대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인트로덕션이 끝나고 무대는 암전…고뇌의 쓴 잔을 들이키려는 파우스트의 모습이 어슴푸레 보일 때『지금 막이 오르고 있습니다.』한마디를 던지고 아나운서는 언어를 상실했다.
오페라에서 영혼을 파는 계약이 성립되기도 전에 신인 아나운서는 혼을 빼앗겼던 것이다.
보조란 원래 무료입장이라는 느긋한 복권, 중계방송 자료가 손에 있을 리 없었다.
제 2막「쥐의 노래」까지 오페라 중계는 아나운서 없이 진행되고 뒤늦게 급파된 선배 하나가 위기를 수습했다.
『지금 막이 오르고 있습니다.』
모두 열 한자로 된 처녀방송을 끝으로 미스터 김은 아나운서생활의 막을 내렸다.
현장과 라디오를 연결하는 중계방송 시대는 이미 1927년 JODK에서 막을 올렸다.
3월 18일 경성극장으로부터의 무대중계, 이어서 경성호텔 연예장에서 보낸 2시간의 실내중계, 11월 16일 내선 여자중등학교 음악대회와 12월 1일 전선 전문학교 웅변대회를 공회당으로부터 중계했다는 기록이 그것을 입증한다.
1928년 3월, 경성부 연합청년단 웅변대회를 중계한 이른 봄부터 라디오의 광파성에 눈 뜬 사람들은 결혼식 거행 공고와 학예회 실황중계를 요청해 오기도 했다.
그해 5월26일, 공부자 탄강을 기념하는 춘계 석전을 처음으로 중계해서 유구한 전통을 깨뜨린 마이크로폰은 종교를 초월해서 정동 예배당에 참례, 매리미앙양이 연주하는 파이프·올갠의 장엄한 선율을 널리 퍼뜨렸다.
스포츠 중계가 걸음마에 열중하던 1930년, 우리말 방송은 골든·아워에서 밀려나 밤 9시 40분부터 11시까지의 외곽으로 쳐졌고 연예 프로그램도 답보상태였다. 이 슬럼프를 깨뜨리는 다채로운 기획으로 밤 공연의 중계방송이 시도되었는데 조선극장으로부터의 계림 8도 명창대회 중계는 갈채를 받았다.
1927년 악성 베토벤의 100년제에는 서울의 양악계 권위자를 총동원해서 추도방송을 특집 했으나 다음해 슈벨트 100년제 기념방송은 오직 레코드에 의존해서 경제적으로 치룬 JODK는 1928년의 연말특집「제야의 종」중계방송 경비도 절약, 본원사의 종을 떼어다 스튜디오로 반입했다.
주지는 빨리 돌려달라고 독촉을 했으나 방송국은 종을 강제점유, 빼앗긴 땅의 백성들은 그해, 빼앗아 온 종소리를 들으며 묵은해를 울려 보냈다.
제 2 방송으로 우리말이 독립한 30년대는 이른바 개화기, 중계방송 반은 연평도의 조기잡이, 강릉의 농악놀이 등을 따라 동서를 횡단하며 장거리를 뛰었다.
이동방송차가 등장했던 해의 6월 4일, 아침 이슬을 즈려밟고 광릉 숲 속에 들어간 마이크로폰은 6시 45분부터 7분간 이풍치림에서 우는 새소리―청아한 자연음을 라디오에 흘렸다.
소리를 통한 일종의 자아발견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