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운서, 최세훈/아버지의 책, 증언대의 앵무새

앉아서 천리 [말의 화가]

최철미 2015. 6. 14. 08:43

□ 앉아서 천리

1959년 4월 제3회 자유아세아 여자 농구리그를 중계하던 임택근 아나운서는 마닐라에서 열병으로 쓰러졌다. 하이·눈의 벽시계처럼 초침은 분침을 분침은 시침을 재촉해서 경기시간으로 달음질 쳤다. 체온계의 눈금은 39도를 넘어섰다. 낮선 풍토의 극한 상황 속에서도 한은 팀의 연전연승을 고대하는 고국동포의 얼굴이 빙빙 도는 천장 위에 이중촬영의 스크린 프로세스처럼 아른거렸다.
비칠 비칠 일어섰다.
포복하듯 엔지니어에게 다가가 만일 쓸어져 버리면 스코어만이라도 전해달라는 비장한 부탁을 한 뒤 중계석에 앉았다.
그런데 충격요법이었을까?
그는 곧 쾌유 되었다.
돌아온 그에게 이승만 대통령은『잘 하는 변사』의 칭호를 하사했다.
그러나 다음해 8월 이광재 아나운서와 함께 애천에 동전을 던지고, 빙·크로스비와의 기념 촬영을 스브닐로 가지고 돌아온 그에게 관영방송은 군대처럼 미귀벌을 내렸다.
17회 로마 올림피아드의 귀로가 유럽 관광으로 늦어졌기 때문이었다.
벤베누티에게 판정으로 졌던 아마추어시절부터 김기수 선수는 4각의 정글 밑에서 사자후하는 임택근 아나운서의 목소리를 의식하게 되었다.
강세철, 벤베누티를 물리쳐 파라마운트에 이르는 승리의 가도에 언제나 임택근 아나운서의 첩보가 메아리졌다.
임택근 중계=김기수 승리라는 공식이 정립되었고 대전을 앞두고는 수염과 손톱을 깎지 않고 목욕을 하지 않는 징크스와 함께 김 선수는 그 공식을 미신하게 되었다.
이 테크니시언은 라운드의 횟수와 시간 경과를 알리는 우렁찬 목소리를 엿듣고 스태미너의 배분을 하게 되었다.
이 신화에 불신의 그림자가 드리우기 전, 고전수조와의 논차이틀 12회전을 벌였을 때 이철원 아나운서가 오픈·게임을 임택근 아나운서가 메인·이벤트를 독점 중계했다.
다시 공식은 확인되고 가쁜 숨을 몰아쉬는 승리자와의 인터뷰를 끝낸 다음,
『지금까지 기술 담당에…』하고 곁눈질한 자리에 엔지니어는 없었다.
역사는 반복한다고 했던가? 9년 전 합포웰 축구단 경기 때의 체험이 있는지라 여유만만,
『…기술담당에 임택근 담당 아나운서 이철원이었습니다.』
문화방송의 방송부장이 된 그에게 하루는 봉두 난발의 한 장년이 찾아와 처음부터 돌격태세를 취했다.
『클레이가 왜 저능아란 말이오?』
위대한 헤비급 챔피언을 IQ미달이라고 악평한 것을 참을 수 없다는 엄중 항의.
그 떠벌이 모하매트·알리의 신봉자는 거품을 뿜는 클레이지였고 임택근 씨는 클레이에 대해 언급한 일이 없었다.
스포츠 팬은 뇌병원에도 있는가?
KBS가 처음으로 스키 실황 중계를 시도한 것은 1961년 1월 대관령에 적설량이 풍부했던 정초의 일이었다.
대통령과 민의원의장 하사기 쟁탈전으로 겸한 학생 스키 선수권대회를 동시에 리레이 하려고 HLKA은 극지탐험 같은 의욕에 불탔다.
FM시험은 대관령 고개에서 막혔고 4킬로미터 현장까지 선로를 가설하기에는 너무나 먼 거리였다.
녹음기를 둘러맨 박영선 아나운서는 제3 스키장까지 영하 15,6도의 혹한 속을 걸어 올라갔다. 초속 20미터의 강풍이 불어 사람과 기계는 아이스케이크처럼 얼었다.
7시간 동안 추위와 싸운 작업 끝에 이 빙설의 향연을 녹음하는데 마침내 성공, 스키중계의 역사를 창시했다.
그러나 엔지니어 가동현 씨는 동상에 걸렸고 몸에 박인 얼음은 오래도록 녹지 않았다.
이러한 고투 끝의 영광을 흐리게 하는 이지·고잉이 5년 후 남산연주소로부터의 좌견천리에서 들어났다.
캐시우스·클레이의 선수권 방어전을 실황속보 하는데 그치지 않고 직접(가상)중계하는 방식이 출현했던 것이다.
텔레타이프와 AFKN의 동시 번역과 상상력을 동원한 천리안적 원근법, 이 실험의 창안자는 문화상 후보에도 오를 만하다.
『라디오에 의해서 모나리자의 미소를 표현하는 것처럼 어려운 일은 없다.』고 말한 아론·하임의 시대는 가지 않는다.「예술로서의 라디오」로 승화시키려면 그림의 기조를 바로 잡고 박리다매를 삼가야 한다.
말의 화가들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