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운서, 최세훈/아버지의 책, 증언대의 앵무새

기술 담당에 기술 담당에 [말의 화가]

최철미 2015. 6. 14. 08:41

□ 기술 담당에 기술 담당에

미국이 근대 올림픽의 왕좌를 소련에 빼앗겼던 그 16회 올림피아드에서 우리는 단 하나의 희망이었던 골드 메달을 서부독일에 빼앗겼다. 송순천 선수의 반탐급 결승전. 그리고 김창희 선수의 역도 4위 입선을 중계하며 임택근 아나운서는 조국애의 눈물을 전파 위에 흩뿌렸다.
제 16회 올림픽의 마라손 11만 관중을 수용하는 그곳 멜본 그리켓트·그라운드의 메인 스터디움 맨 꼭대기에 자리 잡은 각국의 중계방송 반은 망원경 없이는 게임이 가시거리 안에 들어오지 않았다.
선수들의 모습은 하나의 점이었다.
딴 나라의 중계반에서는 거의 망원경으로 내려다보며 중계를 하고 있는데 그는 눈치로 중계방송을 해야 했다.
올림픽의 메인 게임인 마라손이 관중들의 환호리에 골인하고 있었다.
육안으로 도시 식별할 수 없는 운동장을 내려다보며 옆의 망원경 중계반의 눈치를 살피면서 1착 2착 차례로 중계를 하고 있는데 네 번째 선수가 들어서자 갑자기 옆의 NHK아나운서가『우리 일본 선수가 제 4착으로 들어섰습니다.』 하고 방송하는 바람에 그도 엉겁결에 힘없이 그렇게 따라 방송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트랙을 도는 것을 가만히 본 그는 정정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분명 그 선수는 우리 이창훈 선수였던 것이다.
『재 4착은 일본선수가 아닙니다. 고국에 계신 여러분! 제 4착으로 우리 이창훈 선수가 골인했습니다.』
착각을 잊은 채 그는 감격했다.
처음 들어간 캬프테리아에서 웨이터의 주문을 한 시간이나 멍청히 기다렸다는 그들- KOREAN은 50여 개국에서 모여든 수 백 명의 아나운서 가운데서 가장 연소하다는 사실에 경외를 느꼈다.
맨손 맨입의 재래식 무기 뿐인 그들을 늘 앞지르던 외국인의 기동력- 이동 방송 차는 다음 해인 1957년에야 우리나라에 도입되었다.
헤드라이트와 깎아 지른 면상의 만화의 주인공을 닮아「고바우」로 애칭된 VAN형 단거리 무선중계차는 마작 판의 골패처럼 동남서북으로 잘도 굴러 다녔다.
에네르깃슈한 목소리와 고속도의 애드리브로 고바우 선생의 고객이었던 임택근 아나운서는 이스라엘의 합포웰축구팀이 내한했을 때 엔지니어 직무대행까지 해냈다.
중계방송을 마치고『담당 아나운서 임택근, 기술담당에…』하고 옆을 보니까 Jesus Christ! 기술자는 이름을 모르는 신인, 그래서『기술담당에…기술담당에…』할 수 없이『임택근 이었습니다.』
1958년 제 3회 아시안 게임의 성화가 꺼지기 전 그리고 Ever on ward의 전광이 스코어 보드에 점멸하기 전, 16만개의 눈동자는 메인스타디움의 입구에 흡반처럼 달라붙어 있었다.
올림픽의 꽃이라는 마라손의 대단원,
『우리 대한민국의 건아 이창훈선수 지금 당당 제 1위로 그 용자를 나타냈습니다.』
강찬선 아나운서는 절규했다. 마침내 결승점까지의 카운트 다운.
『앞으로 20미터…10미터…5미터…꼴인! 꼴인!』
해일처럼 뒤채이는 관중.
『대한민국 만세! 마라손 한국 만세! 이창훈선수 만세!』
순수하게 울었고 순수하게 울렸다.
주지적이어야 할 중계태도를 논하며 칼끝처럼 날름대던 비평가를 침묵시킨 감격의 아나운스멘트 만세.
인쇄매체를 압도했던 그 속보 임무에서 돌아오자 강찬선 아나운서는 효창운동장에서 제 2회 아시아 축구 전을 중계했다. 강호 이스라엘을 3대 0으로 물리친 기적적 승리의 첫 꼴이 들어가자 그는 또 첩보에 취했다.
『고국에 계신 동포 여러분 기뻐해 주십시오….』
관성이란 얼마나 무서운가?
착각임을 곧 깨달은 그의 시야에 고국 서울 효창동 산마루의 판잣집들이 주절이 주절이 열렸다.
스포츠는 백화제방, 중계방송은 아시안 게임의 표어처럼 끝없는 전진을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