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운서, 최세훈/아버지를 추억하는 회고담 모음

시인 아나운서 - 아나운서 통사- 김성호(광운대 미디어영상학부 교수, 전 KBSi 사장)

최철미 2014. 2. 2. 09:41

문학 전문지 통해 시인으로 등단한 첫 아나운서 최세훈
글·김성호(광운대 미디어영상학부 교수, 전 KBSi 사장)

최세훈은 1962년「자유문학」사가 공모한 전국신인문학상에 당선되어 시인으로 등단한 한국방송사상 최초의 아나운서이다. 그는 1962년 1월 15일 마감한「자유문학」지 작품 모집에 응모하여 시 작품〈수연〉이 당선작으로 뽑혀 문단에 데뷔한 것인데, 그 때 시인 지망생들이 응모한 시 편수만도 무려 682편이었다고 한다. 그는 이처럼 치열한 경쟁을 뚫고 당당히 당선되어 시인으로 공인을 받은 것이다. 그 당시에 발행된 유일한 방송전문지〈주간방송〉에서는 이와 같은 상황을 최세훈의 사진까지 싣고 4단 크기로 기사화하기도 했다. 그 기사 가운데 뒷부분을 원문대로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아나운서이며 또한 시인이기도 한 사람으론 최세훈 씨가 처음이기도 하다. “언어에 대한 우아성과 예민한 감수성을 나타내고 있어 자연에 대한 태도가 두드러지게 눈에 띈다.” 라고 평한 선자의 얘기처럼 씨는 아나운서이기 전에 시를 쓰는 한 사람의 예술가인 것이다. “기쁘다기 앞서 어떤 두려움이 앞섭니다.” 공개방송〈세 개의 열쇠〉를 담당하고 있는 아나운서-그가 바로 시인인 것이다.

최세훈이 서울중앙방송국 아나운서로 입문한 시기는 1955년 후반기로 보인다. 그는 지방방송국에서 아나운서 생활을 하다가 중앙방송국의 충원 계획에 따라 지역 아나운서 가운데 특별 심사를 거쳐 서울에서 근무하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와 동갑내기로 대학을 함께 다닌 변호사 한승헌(전 감사원장)이 아나운서를 동경하여 응시했다가 최세훈만 합격되었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는데, 이 사례는 이들이 전북대학교 재학 중 KBS 이리방송국(현 전주방송총국)에서 발생한 사건(?)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최세훈은 자신의 저서에서 아나운서 위계를 거론하면서 1954년 7월 공채를 거친 전영우 다음으로 “그 뒤의 서열에서는 최세훈에 이어 본향으로 회전한 성우 고은정과 나현수… 9개월 후 이광재, 박종세, 임동순씨가 신인 아나운서로 데뷔….”라고 기록하고 있다.
최세훈은 지역국 방송 경험을 살려 서울중앙방송국 아나운서로서 곧장 크게 활약했다. 그는 1960년대 전반까지 10년 여간 KBS에서 아나운서이자 MC또는DJ로 담당 프로그램을 반석에 올려놓는 견인차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특히 최세훈은 1950년대 말〈라디오 게임〉이라는 공개방송 프로그램을 통해 젊은이들의 우상이 되었다. 그러한 성공의 밑바탕에는 최세훈의 명석한 두뇌와 기민한 재치 그리고 그의 뛰어난 말씨와 글쓰기가 자리했기 때문일 것이다. 아나운서실의 재주꾼으로 불린 그는 문제도 알듯 말듯 아기자기 재미있게 냈지만 사회도 재치있게 진행했다. 따라서〈라디오 게임〉하면 최세훈을 연상하게 되고, 그는 이 프로그램과 동반자 관계에 있었다. 이 프로그램은 꽤 오랫동안 장수했는데, 그 요인은 퀴즈라는 오락적 수단을 통해서 새로운 지식과 지혜를 얻을 수 있는 일거양득의 장점에다 출연자와 청취자 층이 지적 호기심이 큰 중고생 등 청소년들이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그는 이 프로그램을 통해 프로그램과 아나운서가 한 몸(작가 겸 MC)이 되어 함께하면 프로그램이 생명력을 가지게 된다는 교훈을 남겼다. 그는 1962년 3월 이 프로그램의 사회와 출제를 맡는 동안 ‘흥미와 실익’ 이라는 공통 인수를 가진 450개의 문제를 추리고 그에 간결한 해답을 달아 단행본을 내놓기도 했다.
최세훈은 또한 DJ프로그램에도 일가견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대표적인 프로그램으로〈희망의 속삭임〉을 들 수 있다. ‘화제와 지식의 선물’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세웠던 이 프로그램은 아나운서 계보에 따라 ‘제1주자였던 강익수 아나운서, 그리고 그 오프닝 아나운서멘트에서부터 자기 독특한 개성을 발휘해서 멜로디와 이야기의 칵텔을 보낸다는 임택근 아나운서, 희망을 실은 멜로디를 따라 여러분의 행복한 가정을 방문한다는 최계환 아나운서, 음악의 흐름을 따라 우리들의 생활 주변을 산책한다는 전영우 아나운서’ 등과 최세훈이 DJ로 참여하여 진행했다. 이 분야에서도 그는 자신이 집필한 스크립트만을 모아 프로그램 타이틀로 단행본을 출간하기도 했다. 최세훈은 이 밖에도 KBS 제1방송의 유일한 리퀘스트 프로그램인〈희망음악실〉의 DJ로 활동하기도 했으며, 공개방송프로그램인 〈재치문답〉,〈세 개의 열쇠〉등에서 명 MC로 명성을 날리기도 했다. 아울러 그는 1961년 말 KBS-TV가 개국되면서 간헐적으로 대담 프로그램이나 공개방송 프로그램(TV그랜드 쇼, 금주의 바라이어티)MC로 텔레비전에 모습을 보였다. 특히 그는 1962년 애국가의 작곡가 안익태가 귀국하자 온 국민의 관심 속에 그와 대담하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기도 했다.


최세훈은 1964년 4월, 10년여 동안 몸담았던 KBS를 떠나 민방인 MBC로 이적한다. 그는 선배인 임택근이 방송책임자로 스카우트되자, 얼마 후에 KBS후배 아나운서들(최정연, 송영규, 임국희, 최승일 등)과 함께 MBC로 옮겨 아나운서 실장으로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그는 MBC로 옮긴 후 곧바로 봄 개편에 신설된 토크 쇼 프로그램〈유모어 대학〉의 MC를 맡아 그 당시 유명 패널인 안의섭, 한국남, 엄익채, 정연희 등과 더불어 무궁무진한 화제를 만들어 냈다. 그는 공개 프로그램 MC에서 뿐만 아니라 DJ로서도 프로그램에 대한 기여도가 컸다. 그는 금주의 가요베스트 10과 미국의 탑튠 베스트 10을 다루는〈MBC 힛 퍼레이드〉와 개편된〈탑튠 퍼레이드〉를 진행하기도 했다. 최세훈이 진행한 라디오 프로그램 가운데 그 특유의 매력적 해설을 발휘한 프로그램은〈젊음은 가슴마다〉일 것으로 보인다. 청소년 대상의 팝음악을 다룬 이 프로그램은 1968년 추동계 개편 때 탄생했다.
최세훈은 치프 아나운서로 청와대 대통령 기자회견 중계 등 크고 작은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아나운서 실장 보직이 과장급에서 부장급, 국장급(1969)으로 승격되며 10여 년간 장수한다. 그는 1964년 4월 25일 MBC 아나운서실장으로 스카우트되어 1973년 10월20일까지 아나운서 치프로 재직한 것이다. 또한 그는 1969년 8월 MBC-TV가 개국되자 뉴스 캐스터와 오락 프로그램인〈월요 이브닝쇼〉의 MC등을 맡다 1973년 말 아나운서 생활을 마무리하고 해설위원, 연수위원으로 생활한 후 지역 MBC가맹사의 중역으로 전임됐다.


최세훈은 아나운서실장 시절인 1967년, 문인 아나운서답게 또 한 권의 단행본을 출간했다. 한국방송사 한쪽의 귀중한 사건사(?)를 집대성한「증언대의 앵무새」. 책 표지 다음, 첫 장에 쓴 글이 가히 시인답다. “음성과 음향과 음악의 꽃잎을/ 하늘 위의 에텔이 실어 나른다./ 진공의 유리관에 풍매화처럼 피는/ 라디오…/ 발신지에는 침전하는 게 있다. 이것을 다시 걸러 독자에게 중계한다./ on AIR·지금 방송중.” 이 책의 서문 격인〈프롤로그 왕복 서간〉에는 그가 최세훈의 방송사, 최세훈의 개인사에 존경하던 방송계의 거목 장기범과의 인연이 포연처럼 담겨있다. 최세훈 씨 당신은 광산과를 했다면서 금은 캐지 않고 잊혀진 지층을 발굴하고 있었구료. ……장 선생님 역사의 기술자는 언제나 각광의 그늘에서 화려한 주역들을 응시한 문약한 인간이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두 명 아나운서는 하느님이 필요했던지 일찍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최세훈의 방송 생애를 논하면서 선배 아나운서 장기범을 결코 빼놓을 수 없다. 필자는〈장기범 평전〉을 집필하면서 이 두 분의 연관을 추적하다가 미국에서 공인회계사로 활동하는 최세훈의 딸 최철미를 알게 되었고, 그가 보내준 장기범과의 관련 사료를 유익하게 활용하기도 하였다. 필자는 최철미가 미국에서 보낸 서신 가운데 “저희 아버님과 장 선생님께서는 돈독한 방송 선후배이셨다고 들었습니다. 저희 아버님의 장례식이 끝난 후에도 몇 번씩 위로와 격려의 전화를 주셨던 것으로 기억합니다.”라는 구절이 지금도 생생하기만 하다. 필자는〈장기범 평전〉에 이 두 분의 교유 관계를 다섯 쪽 가량 기술하기도 했다.
최세훈 아나운서! 그는 노정팔이 본 대로 “첫 눈에도 재주꾼으로 보일 만큼 재기가 차 있었다. 말도 잘 하지만 글재주가 뛰어나 아나운서실의 글을 거의 도맡아…”썼던 재사임에 틀림없다. 그와 같이 구성작가로도 날리던 최세훈은 지역 몇 군데 MBC중역으로 재직하다가 병이 악화됐고, 급기야 1984년 2월 11일 마산MBC 이사 시절 50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최세훈! 그는 아나운서로서 고민이 많았던 지성인이었다. 그는 스스로에게 “과일을 익게 하는 따뜻한 바람과 같은 인간성을 가져야 한다.”고 다짐했던 한국방송사의 첫 시인으로 데뷔한 명 아나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