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운서, 최세훈/아버지를 추억하는 회고담 모음

장기범 평전 중에서.. (김성호 광운대 미디어영상학부 교수, 전 KBSi 사장)

최철미 2014. 2. 2. 09:48

후배 최세훈의 죽음
장기범의 은둔생활을 예감했던 후배 최세훈(崔世勳)은 선배에게 지방나들이를 간청했다. 그래서 최세훈은 장기범을 전주(全州)로 초대하려고 기차표를 몇 장 예매하여 보냈다. 비록 이때 최세훈은 전주문화방송 상무이사에서 대전문화방송으로 자리를 옮긴 뒤였지만, 아무래도 전주는 최세훈의 근거지일 뿐만 아니라 술자리를 마련하기에도 더 나았다. 그 술자리는 가장 좋고 이름난 집에서 시작됐다.
최세훈은 가장 비싸고 좋다는 술을 장기범에게 권하면서 그 특유의 재치를 발휘했다. 그는 “원장님은 베리나인으로 하시죠, 저는 베리텐으로 하겠습니다”라고 말하면서 잔을 올렸다. 기지의 달인인 장기범은 그 화법을 금방 읽고 이렇게 화답했다. “그렇지 최 상무는 베리텐으로 해야지”
쉰을 바라보던 40대 후반의 최세훈은 이미 건강에 빨간불이 켜져 있었다. 최세훈은 1954년 KBS 아나운서로 방송계에 입문하여 장기범의 지도를 받았고, 장기범이 서울중앙방송국 방송과장시절인 1964년 MBC 아나운서실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그는 몇 년 뒤 아나운서 실장 자리에서 물러나 한직(閑職)에서 무료하게 지내다가 서울 MBC에서 더 이상 버티기가 어려워 지방 가맹사인 전주‧대전문화방송으로 자리를 옮겨야 했다.
최세훈은 건강이 많이 나빠진 상태여서 일상생활을 하기에도 버거웠다. 하지만 존경하는 선배의 무료함을 조금이라도 덜어드리고 싶었고, 그 마음을 누구보다 잘 헤아린 장기범은 그의 건강을 걱정하여 대작(對酌)을 삼갔다. 최세훈은 그 당시 새롭게 선보인 최고의 술을 선배에게 대접하면서 자신은 ‘보리차’를 마셨다. 최세훈은 선배가 드는 술과 색깔이라도 비슷해야 선배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최세훈은 새해가 되자 세배를 하러드리러 장기범의 집을 찾아갔다.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다가 최세훈이 의미심장한 말을 건넸다. “원장님은 고려시대 사셨다면 위화도 감이고 조선시대에 사셨다면 강화도 감입니다.”
최세훈은 대쪽 같던 선배에 대한 존경의 마음을 이렇게 은유적으로 표현했다. 장기범과 최세훈은 이러한 이야기에서 볼 수 있듯이 각별한 동지요 상사요 스승과 제자였다. 그러나 장기범은 1년 남짓 후에 그토록 사랑하던 최세훈의 죽음 앞에 서게 된다.
장기범이 최세훈을 유달리 특별한 후배로 여긴 흔적은 여러 곳에서 찾을 수 있다. 장기범이 맡았던 1960년대의 인기 공개물 <스무고개>, <재치문답>의 사회를 최세훈에게 물려줬고, 최세훈의 저서에 서문을 쓰기도 했다. 이렇게 끔찍이 사랑했던 후배가 먼저 세상을 떠나다니, 장기범의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최세훈은 1984년 2월 11일 마산MBC 이사로 7개월 정도 재직하다 대전에서 별세했다. 장기범은 이 비보를 접하고 대전의 빈소를 찾아 통곡했다. 마산 MBC 방송이사 최원두의 조사(弔詞)에 이 모습이 상세히 나타나 있다.

(중략) 평소에 형이 그렇게 존경하시던 장기범 선배님도 “어허- 이 사람이 갔어! 이 사람이 갔 어!” 하시며 연신 빈소를 드나들며 형이 그토록 좋아하시던 인삼 담배에 불을 붙여 향로에 꽂았습 니다. 장기범 선배님 돌아가시면 장의위원장 하신다던 약속을 형이 지키지 못하게 되었다고 어제 밤 에도 내내 우셨습니다.

그 당시 마산MBC 총무국장 이완희(李完熙)도 마산 MBC 사보에 “최 이사와 남다른 인연을 갖고 있는 장기범씨는 '이 사람아, 내가 죽으면 장의위원장이 돼 주겠노라 해놓고 왜 자네가 먼저 간단 말이냐'라며 통곡했다”고 적어 놓았다.
최세훈의 죽음은 그야말로 장기범에게 큰 슬픔이었다. 장기범은 평소 최세훈의 방송력과 문장력을 높이 평가했을 뿐만 아니라 그를 방송인의 자랑으로 여겼다. 그리고 최세훈은 장기범을 ‘방송인의 전형적인 교과서’로 본받고 하늘처럼 받들었다. 호칭부터도 감히 ‘선배님’이라는 표현은 상상할 수 없었고 글을 쓸 때는 ‘선생님’, 면전에서는 ‘원장님’이라 불렀다.
저자는 이 평전을 집필하면서 장기범에 대하여 각별했던 최세훈의 유족을 찾아 나섰다. 다행히 딸과 아들이 미국에 거주한다는 소식을 듣고 편지를 보냈다. 맏딸 최철미(崔哲美)는 서신과 함께 몇 장의 사진과 문헌 자료를 보내 주었다. 서신 가운데 장기범과의 얽힌 사연은 다음과 같이 같았다.

저희 아버님과 장 선생님께서는 돈독한 방송 선후배이셨다고 들었습니다. 저의 아버님의 장 례식이 끝난 후에도 몇 번씩 위로와 격려의 전화를 주셨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전북 김제 선산 에 있는 저희 아버님 묘비명을 써 주신 분도 장 선생님이십니다.(중략)

 

 

 


1) 이 때가 1982년 하반기 또는 1983년 상반기로 보인다. 최세훈은 1977년 전주문화방송 상무 이사로 있다가 1981년부터 대전문화방송으로 옮겼다.

 

2) 최원두, <조사 -그토록 좋아하시던 인삼담배에 불을 붙여‧‧‧>, 《마산MBC사보》, 1984. 3, p.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