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운서, 최세훈/아버지를 추억하는 회고담 모음

최원두 씨의 회고담

최철미 2014. 2. 2. 09:59

 

1965년 쯤이던가, 그것이 내가 처음 최세훈형과 일한 시기였다. 그의 첫 인상은 지극히 사무적이라는 것이었다. 천신만고 끝에 출연자들을 모아 놓고 진행 협의를 마친 다음 사회자를 모셔온다. 그런데 출연자 중에는 언제나 저명 인사들이 끼여 있게 마련이어서 PD입장이 여간 조심스러운게 아니었건만 사회자는 메모지 한 장을 달랑 들고 와서 정중하고 의례적인 인사만을 한뒤 ‘가실까요’하고 앞장서 스튜디오로 올라간다. PD는 테이프상자를 한아름 안고 따라 올라가 그때부터 시작되는 창안의 진행과정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스튜디오 안에서 손가락의 동그라미 신호가 나오기만 기다린다. 시작도 자신만만이지만 끝나고 나서도 자신만만이다. 주섬주섬 테이프 뭉치를 챙겨들고 부조정실을 나오면 초청연사도 사회자도 온데 간데 없고 학생 출연자 두서너명이 서성거릴 뿐이다. 초창기의 아나운서 부장은 이렇게 바빴다. 1인 5역 10역으로 인사동 동일가구 건물 2층에서부터 6층까지를 쉴사이 없이 오르내렸다. 당시의 정오 뉴스는 고 최세훈형의 전담 시간. 깔끔한 와이셔츠에 유난히 눈에 드러나는 넥타이를 팔랑거리면서 보도국문을 밀치고 들어서면 누가 보거나 말거나, 또 인사를 받거나 말거나 가벼운 목례로 보도국전체를 일견하고 뉴스 원고 앞에 앉는다. 예사롭다면 예사롭고 특이하다면 특이한 그의 목례. 이것은 그의 살아가는 질서였으며 직장에서의 질서였다. 지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장소의 부적당을 고려치 않고 예와 의를 갖추는 그의 ‘질서’앞에서 혹자는 피곤함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오해도 많았다. 남에게 예의를 갖추고 예의로 대접받기를 고집하는 최세훈형 역시 보이지않는 마음 속의 충돌을 수 없이 겪어야했을 것이다. 이러한 표정을 감추기 위해서 그는 사무적인 태도를 취했는지 모른다. 불필요한 대화는 생략했다. 말뿐만 아니라 행동 또한 절제했다. 스스로 자기의 성을 쌓고 그 안에 성주이기를 원했다. 이따금 진하게 술을 마시고 기분이 도도해졌을 때, 닫힌 성문을 열고 잠깐 밀폐된 마음의 방을 엿볼 기회를 주었을 뿐이다. 이 기회마저 갖지 못한 사람들은 지금까지 최 세훈 형에 대해서 불필요한 오해를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최 세훈 형이 시인인 것을 내가 안 것은 몇 해가 지나서였다. 1967년이었던가. “휴전선 155마일을 가다”라는 6·25 특집을 르뽀하는 주간 연속 프로그램에서였다. 첫회 방송에서부터 이상하게 말이 입에 착착 달라 붙었다. 걸리는 곳이 한 곳도 없이 방송 문장의 특징인 조의 리듬을 물결처럼 타고 흘렀다. 내가 쓴 졸필의 기사가 갑자기 최 세훈 형의 목안에서 화려한 꽃으로 변신하여 튀어 나오는 듯한 황홀함을 느꼈다. 특히 마지막 회를 녹음하는 날, 휴전선의 마지막 패말리 꽂혀 있는 강원도 송현 근처의 동해안을 묘사하고 있었다. 해당화밭이 지도처럼 길게 누워 있는 모래사장으로 억센 파도가 숨가쁘게 밀렸다. 기분을 내었다. “꽃아, 보이지 않는 휴전선이 네 꽃잎을 가르고 지나가는 아픔이 있으면 말해다오!” 최 세훈 형은 적절히 호흡을 조절해 가며 그 특유릐 바이브레이션, 그 울림의 아름다움을 한껏 살려서 거침없이 읽어 내려갔다. 그는 조용히 울었다. 스튜디오를 나오는 그의 눈은 촉촉이 젖어 있었다.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시인이 쓴 기사, 시인이 읽었을 뿐이야.” ‘아, 시인이었구나. 그래서 내 기분속에 들어왔구나. 그래서 민족의 비극을 아프게 바라보는 나의 아픔 속으로 그이 또한 아파하며 들어 와서 아픔을 같이 했구나.’ 공감대의 형성, 이것을 통해서 나는 비로소 그가 시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자신의 노출을 꺼리는 결벽성, 그러나 방송 속에 묻힐 때에는 혼신의 힘을 다해서 몸을 내던지는 최 세훈 형. 그래서 그에게 있어서 방송은 작업이 아니라 인생이었다. 그의 전부였다. 나와 최 세훈 형이 가장 오래 함께 일한 것은 일년 가까이 침식을 같이 하다시피한「MBC모닝 쇼」의 제작 때였다. 나는 그에게 저녁 제작 회의에 동참할 것을 요구하였고 그는 이 요구에 선뜻 응해주었다. 그리고 같이 토론하였다. 제작 회의는 날로 열을 더해갔고, 그만큼 회의 시간도 길어졌다. 우리가 미숙하였기 때문에 실마리가 안 풀리는 일도 많았지만 그는 한번도 노여움이나 짜증 없이 미숙한 우리의 주장을 마지막까지 들어주었다. 혼혈아 드레이어 상등병이 헤어진 어머니를 찾는다는 보도가 신문과 방송에서 동시에 터져 나왔다. 이를테면 이산가족 찾기의 원조인 셈이다. 아침방송을 마치고 올라온 우리 팀에게 몇 곳에서 제보가 왔다. 천신만고 끝에 그 어머니를 찾아낸 것은 오후 네시쯤. 그러나 우리 취재 팀에 이끌려 겁먹은 얼굴로 등장한 그 여인은 드레이어 상등병의 가슴에 새겨져 있는 어머니가 아니었다. 그래서 우리는 이들 모자의 상봉을 위해서 어머니의 과거를 윤색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이러한 나의 판단은 적극 지지하고 나선분이 최 세훈 형이었다. 보도 프로그램에 있어서는 무엇보다도 진실을 전달해야 한다는 것이 불변의 진리이겠지만, 그러나 보도를 한 이후의 문제에 대해서도 책임을 져야 한다는 언론의 기본 양식 또한 후퇴할 수 없는 논리였다. 이 후자의 주장에 최 세훈 형은 인간적인 입장에서 적극 동조하여 주었고, 결국 소설같은 윤색작업이 시작되었다. 그날밤 늦게, 어디선가 한잔 술을 걸친 형이 나를 찾아와서 나의 모험같은 판단을 칭찬하고 격려해준 것, 그리고 다음날 방송을 마친 다음, 내가 주선한 모자 상봉의 기자 회견장에서 빙그레 웃으며 득의에 찬 표정으로 말 없는 대화를 던져 주던 것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이러한 최 세훈 형도 가정 생활은 별로 순탄치가 못했던 것으로 안다. 심심챦은 소문이 몇 차례나 나돌더니, 어느날 갑자기 기획의원으로 발령이 나고 뒤이어 방송위원, 연수 위원으로 현업의 외곽 지대로만 맴돌았다. 나는 여기서 굳이 소문의 진위를 왈가왈부하고 싶은 심정은 추호도 없다. 그때도 그렇고 이제 윤곽이 드러난 지금에도 그 심정은 마찬가지이다. 어쨌든 이러한 소문의 회오리 속에서 어느날, 그는 훌쩍 전주MBC로 떠났다. 그리고 무심하게 세월을 보내다가 문득 생각이 나서 전화를 걸었다. “어떻게 지내세요?” “잘 있어요. 다 하나님의 섭리로 알고 삽니다.” “아, 교회 나가시는군요.” “고맙습니다. 나 집사라는 것 아시죠?” “그럼. 우리 열심히 믿읍시다.” 의외로 밝고 생기에 찬 음성, 그리고 믿음의 축복속에 산다는 것을 확인하는 내 기분은 상쾌하였다. 그런데 내가 마산MBC로 오고 최 세훈 형이 대전MBC로 자리를 옮겼을 때의 전화 목소리는 어쩐지 우울했다. 나는 나름대로 타향에서 느끼는 생소한 기분 때문일 것이라고 해석하였다. 요즘에야 안 사실이지만, 이미 이때가 두 번째 가정에 큰 파탄이 일고 있을 때였기 때문에 심리적으로 대단히 불안한 방황을 하고 있었다. 이러한 방황이 정리되지 않은 채로 잠시 후에는 마산으로 왔다. 나는 되도록이면 일과 후의 시간도 그와 함께 보냈다. 무척 외로움을 타는 듯 싶어서 술집안내를 열심히 하였다. 이미 건강을 해치고 있어서인지 몹시 술에 약했다. 이런 일, 저런 일로 마음에 상처를 입고 있을 것으로 지레짐작한 나는, 술집에서 위안을 얻어 주기보다는 사지만을 골라서 모시고 다닌 셈이 되었다. 자주 장의 이상을 실토하면서도 병원에 가기를 꺼리며 쓰러졌다가 일어서고, 쓰러졌다가 일어섰다. 일어서면 다시 몇 잔의 술 마침내는 병원에 입원하였다. 이미 어떤 예감이 그를 지배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퇴원하고 나서부터 아무도 모르게 마산을 떠나기 위한 정리가 시작되었다. 마지막까지 자신의 병세와 가정에 대해서 어느 누구에게도 입을 열지 않은 채. 그리고 지난 2월에 대전에서 부음을 전해왔다. 고 최 세훈 형에 관한 단편적 이야기들을 열거하였지만 실은 내가 고인에 관해서 아는 것이 없다고 말할 수 밖에 없다. 더욱이 문화방송에서 만나기 이전의 고인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다.「재치문답」「희망의 속삭임」으로 그의 해박과 정감을 자랑하던 KBS시절에는 나는 오직 청취자였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예의를 존중한 사람이며, 말의 시인이었으며, 방송을 통하여 인간성을 회복하려는 사람이었으며, 커다란 조직의 매커니즘 속에서 마지막까지 방황을 하다가 떠난 사람이라고 체험적으로 말할 수 있을 뿐이다. 나는 끊어진 필름 토막을 잇는 기분으로 고인의 30년 방송인 생활 중에서 몇 토막을 건져 올렸을 뿐이다. 거듭 고인의 명복을 빈다. 방송 속에 묻힐 때는 혼신의 힘을 다해 몸을 내던졌던 최 세훈 아나운서, 방송을 관념으로 해석하려 하지 않고 전신으로 받아들이려고 한 최 세훈 아나운서. 그에게 있어서 방송은 직업이 아닌 인생 그 자체였다.

 최 원두/시인·마산문화방송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