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들의 글모음/작은 딸, 윤경이의 일기

1984. 2.28

최철미 2014. 6. 15. 12:00

(2.28)
현명한 양처가 되기 위해서는 총명한 두뇌와 해박한 지식이 마땅히 필요하다고 생각해오던 나였다. 그러나 그런 여자들 중엔 세상에서 흔히 말하는 양처보다는 악처가 된 사람이 많다는 얘길 듣고 난 어긋난 얘기다 싶었다. “왜냐하면 우수한 여자였을수록 이상주의자였기 때문이다.”난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런 여자들은 스스로 관념의 포로가 되어 결혼한 일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현실과 직면했을 때 패배자가 된 경우가 많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의아한 일이다. 나의 허황된 욕망이나 망상을 경계하는 교훈이라고는 생각했지만. 우리는 누구라도 꿈을 품고 산다. 반드시 명민한 사람이 아닐지라도 우리는 모두 이상주의자이다. 꿈꾸는 모든 것은 이루어질 것이며 노력여하에 따라 이상향이 이룩될 수 있다는 확신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현실은 꿈과는 너무나 동떨어져 있다든지 혹은 그 일부분에 그치고 있는 일이 허다하다. 개중에는 자기의 이상을 실현시킨 일이 있다 해도 그것은 순탄이 아닌 간난과 형극의 길이었기 십상이다. 고난과 고통의 길이었다 해도 꿈을 실현한 이는 행복하다. 그건 객관적 가치 이전의 주관적 희열이며 자기완성이라는 자족감을 얻기 때문이다. 자기를 투시하는 시간은 어쩌면 괴롭다. 예리한 자의식의 눈을 감기고 싶은 일도 많다. 스스로에 대해 짜증스러운 적도 많다. 때문에 자기를 투시하는 시간은 어쩌면 세상의 어떤 일보다 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며 위대한 일이기도 하다. 어긋난 길을 가고 있는 자신의 모습은 유쾌하지 못하다. 적당한 안주와 타협 속에서 체념하고 있는 자길 발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코 우리는 자신을 버릴 수 없다. 아니, 연민스러운 자신을 더욱 사랑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세상에 뜻대로 되는 일이란 드물다. 우리는 결혼도 잘하고 자기의 일도 성취시키며 행복하게 살고 싶다. 그러나 그것이 결코 뜻대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그것이 우리들의 현실이며 어쩌면 인간의 한계인지도 모른다. 아무리 부정하고 싶어도 그것이 우리의 실존일진대 여기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감당하느냐에 따라 실로 한번밖에 없는 우리생애의 빛과 어둠은 결정되는 것 일게다. 우리가 어떤 극한 상황에 처했을 때 우리의 인간다운 진가는 드러난다. 끝없는 절망 속에서만 가장 순수한 생명의 불길은 포착된다. 타인에게 드러나는 자신뿐 아니라 자기 스스로에게 확인되는 자기도 일상 속에서가 아니라 어둠과 같은 고통 속에서이기 십상이다. 그렇다면 우리들의 나날의 좌절은 어둠과 같은 것이 되어 우리를 별처럼 빛나게 할 것이다. 우리들의 나날의 한숨과 고뇌는 우리를 불타오르게 할 가연성의 요소이다. 이렇다면 우리에게 절실히 요망되는 건 오히려 어둠이며 간난이며 외로움이며 슬픔이며 고통이며 절망이랄 수 있지 않을까. 그 아픔을 통해 우리는 성숙하고 외로움을 통해 사랑의 가치를 깨닫게 된다. 이것은 궤변적 자기위로나 역설이 아니며 합리화를 위한 변명이 아니다. 오늘 내가 진실로 목마르다면 이것을 축복으로 알자. 이는 포만한 자가 결코 누릴 수 없는 미각의 세계를 열어줄 것이니. 정녕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 모두를 긍정하고 포용하는 용기이며 아량임을 명심하자. 그래 찬기야. 지금 나의 현실은 간난이며 슬픔이며 고통인 것이다. 훨씬 나중에야 지금의 고뇌가 내 인생에 얼마나 중요한 가연성의 요소였는지 알 것이다. 찬기. 너와 내가 말이다. 너와 내가 얼마나 진실한 친구였으며 너는 곧 다이몬의 소리였음을 깨닫게 될 것이야. 후후. 난 그때까지 기다리마.

(찬기는 당시 유행하던 대학별곡 소설책의 주인공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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