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버이날이 5월 8일로 제정되어 있는 한국과 달리, 이곳 미국에서는 어머니날이 5월 둘째 주 일요일 날로, 아버지날은 6월 셋째 주 일요일 날로 정해져 있다. 그래서, 6월이 시작되면 이곳 백화점에서는 아버지날을 위한 남성용품의 할인 판매가 시작된다. 하지만, 나에게는 면도기나 넥타이등의 아버지날 선물을 사다드릴 아버지가 아니 계시다. 아버지는, 내가 스무 살이 채 되기도 전에 오십도 못 채우고 돌아가셨고, 난, 그 다음 해에 미국으로 와야했었다. 의사가 내린 진단명은 간암이었지만, 나는 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유가 홧병으로 인한 과음이었다는 것을. 당신께서 제 성질을 못 이기시고 홧김에 마셔댄 술이 원인이었다......
간간히 시와 수필을 쓰셨던 아버지는 자상했고 섬세했으며 꼼꼼하셨다. 주말마다 우리들의 손톱과 발톱을 깎아 주셨고, 귀지도 청소해 주셨다. 결벽증에 정리벽도 있으셔서 방마다 있던 작은 쓰레기통에 쓰레기가 있으면 꾸중을 들을 만큼 온 집안이 깨끗해야 했고, 모든 물건들이 정확히 제자리에 있어야 했다. 아버지한테 용돈을 타려면 그 전 주에 용돈을 쓴 내역을 가계부처럼 써서 제출해야 했었다. 반면에, 글을 쓰는 일을 업으로 삼고 사는 다른 사람들처럼 신경이 예민했고, 세상일에는 소심했고, 그러다 보니 다분히 냉소적인 면도 없지 않으셨다. "말에도 영혼이 있다" 고 하시면서, 내가 말 한 마디, 토씨 하나만 틀리게 말해도, 이내 바로잡아 주셨다. 서울에서 지방으로, 대도시에서 소도시로, 전근을 거듭하면서도 한 직장을 떠나지 못하셨고, 내성적인 성격 때문에 친구도 많지 않으셨다.
하지만, 자식들에 대한 사랑만큼은 끔찍하셨다. 어릴 때 우리가 살던 집 앞에는 개천이 있었는데, 겨울엔 얼어붙은 개천 위에서 썰매를 타고 노는 동네 아이들이 많았다. 하지만, 아버지는 행여 우리가 얼음판에서 넘어져 다칠까봐 아예 개천 가까이에도 얼씬하지 못하게 하셨다. 내가 다섯 살쯤 되었을 때였나, 저녁 때 대문 앞에서 넘어져 피가 날 정도로 얼굴을 다친 적이 있었는데, 그런 나를 들쳐업고 병원으로 달려 간 사람은, 옆에서 쳐다만 보고 있던 어머니가 아닌, 아버지였다. 내가 열 살 때쯤 되던 무렵, 오한이 나서 이불과 담요를 몇 겹씩 뒤집어쓰고 누워있던 나를 병원에 데리고 간 사람 역시 아버지였다. 의사는 유행성 간염이라고, 한 달 정도 쉬면 나을 거라고 했지만, 아버지는 알고 있었다. 내가 아버지와 어머니의 이혼의 충격에서 아직 벗어나고 있지 못했다는 것을. 그래서, 새엄마와 새 동생은 그 다음 해에야 우리와 같이 살게 되었다......
아버지, 그러게 왜 아버진 어머니랑 결혼을 했어? 애초부터 할머니랑 고모들이 전부 다 크게 반대했었다는 두 분의 결혼. 그도 그럴 것이, 친어머니는 그 당시에 일곱 살짜리 아들이 딸린 미혼모였고, 아래위로 자매가 열 분이나 있었던 아버진 할머니의 늦둥이 외아들이었다. 할머니와 아버지가 존경해 마지않던 동네 교회 목사님의 "권사님,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구원하는 것도 하나님의 뜻일 수 있습니다." 에 마지못해 승낙하셨다는 할머니. 그래서인지, 결혼식 사진에 나온 할머니와 고모들의 표정들은, 마치 징용을 떠나는 아버지를 배웅하러 온 사람들처럼 하나같이 어둡고 슬프기까지 하다. 할머니와 고모들이 속상해서 흘린 눈물로 울음 바다가 되었다는 우리 아버지의 결혼식, 우리 아버지와 제일 친하게 지냈던 세원 고모는, 속이 상해서 아예 결혼식에 가지도 않았다..... 결혼식 전날에 결혼을 안 하려고 도망까지 갔었다는 우리 아버지, 무엇이 우리 아버지의 마음을 바꾸어 놓았을까...... 동갑내기 친어머니의 집요함에 그만 넘어가 버린, 마음이 여리고 약해빠진 우리 아버지...... 나는 아직까지도, 아버지와 친어머니가 어떻게 십 년 가까이 한 집에서 같이 살 수 있었는지조차도 이해가 되질 않는다....... 결국엔, 내 집이니까 나가달라는 친어머니의 요구에, 아버지는 애들 셋만 데리고 나와버렸다...... (그런데, 그 집도 솔직히 100% 친어머니집은 아니었다. 아버지가 살고 있던 집을 판 돈을 합해서 두 분이서 같이 산 집이었다....)
두 번의 결혼에 모두 실패했던 가엾은 우리 아버지...... 아주 잠깐 대통령을 했던 최규하씨를, 아버지는, 한 평생 집안 살림만 했다는, 그의 아내 홍기 여사 때문에, 퍽이나 부러워하셨다. "여자는 저래야 돼." 당신께선 내심 한 편으로는 현모양처를 원했었지만, 전처나 후처나 처음부터 신사임당과는 아예 거리가 먼 분들이었다. 당시의 보통 여자들처럼 집안 살림이나 남편 내조나 자녀 양육만으로는, 절대로 성이 차지 않는, 그렇다고 두 사람 모두 다 뭔가를 뛰어나게 잘 해서 다른 사람들이 알아주는 것도 아닌, 이것도 저것도 아닌, 그 극도로 피곤한 어중간함....... 결국에는 가족들 모두가 불행해졌다. 가장 불쌍한 건 아이들이었다...... 전처와 후처가 모두 떠난 다음, 아버지는, 나를 앉혀 놓고 말씀하셨다. "넌, 전천후가 되거라."
국문과 출신의 작가지망생이었던 나의 아버지는 가난한 글쟁이가 될 자신은 없었던지 완충지대인 방송계에 머물면서 간간이 시와 수필, 또 방송 관계 서적을 집필하는 일로 당신의 창작욕구를 분출하셨였다. 아버지는, 당신께서 이루지 못한 꿈을 내가 이루어주길 원했고, 나는 아버지의 소망대로 의대에 가기 위해, 내 적성과는 거리가 먼 이과 공부를 했었다. 그래도, 아버지께서 물려주신 총명함 덕분에 성적은 여전히 상위권이었다. 그러던 중, 내가 여고 삼 학년 때, 새엄마와 아버지의 결혼은 결국 파경을 맞았다. 새엄마와 크게 다투시고 난 다음 날 아침에도 아버지는, 간밤에 그런 일이 언제 있었냐는 듯이, 아무런 내색 없이 다정하게 날 학교까지 데려다 주셨다. 나 역시, 간밤에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수선한 집안 분위기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난, 그 무렵에 있었던 대학 입학 시험을 잘 보지 못했다. 시험을 보고 나오는데, 저 멀리서 초조한 모습으로 담배를 피우며 날 기다리고 서 있던 아버지의 모습을, 난 삼십 년이 지난 지금도 잊지 못한다. 저렇게 애타는 모습으로 얼마나 오랫동안 날 기다리고 계셨던 걸까. 그런 아버지의 품에 안겨, 옛날 어렸을 때처럼 "아빠" 하고 엉엉 울어버렸다...... 나는 대학에 떨어졌고, 재수생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에 이래저래 속이 상했던 나는, 아버지께 고등학교 졸업식이 언제라는 얘기도 하지 않았다, 못난 딸 때문에 여고졸업식에도 못 오셨던 아버지는, 왜 졸업식 얘길 안 했냐며 못내 속상해하셨다. 돌이켜 생각하면 그 때 내가 왜 그랬었는지 아버지께 정말 죄송스럽다. 아버진 내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졸업식에도 다 오셨었는데......나의 철없음이, 삼십 년이 지난 지금도 내 가슴을 아프게 후빈다.
새엄마와의 결혼도 실패로 끝이 나고, 미국에 살고 있던 친어머니와의 재결합 시도도 수포로 돌아간 후, 아버지는 잘 드시지도 못하는 술을 많이 드신 탓에 안 그래도 좋지 않던 건강이 극도로 나빠지셨다. 끝까지 나한테는 당신이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으셨던 아버지, 당신의 딸이 한국에서 제일 좋다는 대학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해 냈어, 내 자식" 하시며 기뻐하시던 아버지의 웃음이, 내가 본 아버지의 마지막 웃음이었다. 돌아가시기 사흘 전까지도 "걱정 마, 내 새끼' 하시며 도리어 나를 위로하시던 우리 아버지.
아버지, 그러게, 아버진, 홍기 여사같이 참한 시골 색시랑 결혼을 하지 그랬어요. 다시 이 세상에 오시게 되면, 그 땐 꼭, 아버지밖에 모르는 참한 여자, 착한 여자 만나서 행복하게 오래오래 사세요. 아버지의 삼우제를 마치고 선산을 내려오면서 나는 속으로 빌고 또 빌었었다......
나에게는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들네미가 하나 있다. 아버지께서 살아계셨더라면 정말로 예뻐하셨을, 정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예쁘고 또 소중한 아이. 아버지만큼이나 소심한 나는, 아들아이가 타다가 넘어지면 다칠까 봐서, 선물로 들어온 어린이용 스쿠터도 얼른 가게에 가서 다른 물건으로 바꿔왔다. 내가 학교 다닐 때 하루에 한 알씩 먹으라며 비타민을 챙겨주시던 아버지처럼, 아침마다 아이에게 어린이용 비타민을 먹인다. "사랑, 믿음, 소망" 이라고 적어 주신 아버지의 카드를 보며, 아들에게, 아버지께서 내게 사주셨던 어린이용 성경책을 사 주고, "너를 있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한다." 라고 씌여 있는 아버지의 편지를 보며, 아이에게도 똑같이 말해준다. "I am so happy that you are my son. You are the most precious gift from God. I am so thankful for that. 엄마는 네가 내 아들이라서 너무 행복하다. 너는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가장 귀한 선물이다. 그래서 정말 감사한다."
아버지, 미안해. 내가 아버지 뜻대로 의사가 못 되어서. 하지만, 아버지. 나, 아버지처럼 시도 쓰고 글도 쓰고 그런다, 난, 아버지가 우리 아버지라서, 난 참 고맙고 감사해........ 이렇게 아버지한테 말씀드리고 싶다.
내가 쓰는 시의 근원은, 모두 다 우리 아버지에게 있다...... 아버지의, 무조건적이고 무한했던 사랑에의 회상과, 그런 아버지를 향한, 절절한 그리움에서 비롯한다. 내가 쓰는 산문들 역시 우리 아버지의 이야기로부터 시작한다.......
지금은 하늘에 계신, 이루지 못한 우리 아버지의 꿈은 정녕 무엇이었을까.
(6-5-13 아버지날을 앞두고 쓴 글)
(아버지께서 비타민과 함께 건네주신 쪽지 - 내가 고 삼 때이던 198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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