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 철미의 이야기 /아버지, 최세훈

할아버지 최태진 장로님의 교육열

최철미 2013. 12. 26. 15:04

우리 할아버지 최태진 장로님은 우리 아버님이 12살 때 돌아가셨다.  그래서 나는 사진으로만 할아버님의 얼굴을 뵈었다.  우리 아버님이 미남이듯, 우리 할아버님도 미남이셨다.  우리가 전주에서 대전으로 이사가던 날, 아버지는 먼저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사진부터 들고 새 집으로 들어 가셨다......


우리 할아버지께서는 상할아버지 최윤중 장로님과 상할머니, 문경신님의 2남 3녀 중 장남으로, 1892년 경에 태어나셨다. 차남인 최태섭님은 6.25 때 학살당하셨다.  할아버님 위로 세 분의 누나가 계셨다고 한다.  우리가 전주에 살고 있던 1981년 쯤으로 기억한다.  아버지께서 우리를 데리고 군산에 있는 고모할머니 댁에 들르셨다. 아버님의 고모가 되시는 분이셨다.  그런데, 두 분께서 마주 보고 앉으셔서 아무런 말씀도 없이 한참 동안 눈물만 흘리셨다....  나는 태어나서, 우리 아버지가 그렇게 오랫동안 소리 죽여 흐느껴 우시는 모습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보았다...... 고모님들의 말에 의하면, 군산 고모할머니께서는 할아버지와 가장 많이 닮으신 분으로 100 살이 넘게 장수하셨다고 한다.  그리고 연세가 많으셨음에도 안경도 안 쓰시고 작은 성경책을 일 년에 일곱 번이나 통독하셨다고 한다...... 


상할아버지께서는 무척이나 보수적이고 또 완고하셨던 전형적인 시골 양반이셨던 것 같다.  지금 98세가 되신 자원 고모는 어떻게 그렇게 보수적인 우리 상할아버지가 복음을 받아들였는지가 아직도 궁금하시단다.   번드리의 지주셨던 상할아버지께서 번드리에 선생님을 모셔다가 한글과 산수, 또 성경 공부를 가르치신 덕에 번드리에는 문맹자가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집에 있는 돈을 항아리에 묻어 두고도, 아들을 대처로 유학보내실 생각은 없으셨던 것 같다.  그래서, 우리 할아버지가 상할아버지 몰래 군산으로 도망을 가셔서, 군산 영명 학교에서 수학하셨다고 한다.  상할머니께서 상할아버지 몰래 일꾼들을 시켜 군산에 있던 할아버지께 쌀가마를 보내기도 하셨고, 할아버지께서 직접 군산에서 생선 장사를 하시기도 했다고.  그런데, 다른 사람들의 생선보다 할아버지 생선이 훨씬 더 많이 팔렸다고 한다......   


여기에서 잠깐 할아버지께서 수학하셨던 군산 영명 학교에 대해서 살펴보자. 

군산제일고등학교(郡山第一高等學校)는 대한민국 전라북도 군산시 조촌동에 있는 사립 고등학교이다. 1903년 2월 미국 예수교 남장로회 소속 선교사 전킨(Junckin,W.M., 한국명 전위령)이 설립하였다. 당초의 설립취지는 한국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아울러 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교명을 군산영명학교(群山永明學校)라고 하였다.

‘영명’이란 덕과 학업을 쌓아 온 누리를 밝게 비추라는 뜻이며, 따라서 교과목에서는 덕육(德育)을 특히 중시하여 지도자 양성에 주력하였다. 그리고 청소년들의 지육·덕육과 더불어 체육에도 주력하였으며, 지역 주민들을 대상으로 생활계몽운동·문맹퇴치운동·미신타파운동과 더불어 민족독립운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http://ko.wikipedia.org/wiki/%EA%B5%B0%EC%82%B0%EC%A0%9C%EC%9D%BC%EA%B3%A0%EB%93%B1%ED%95%99%EA%B5%90

 

전킨 선교사님께서 세우신 군산 영명학교에서 받은 기독교 교육이 우리 할아버지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음은 두 말 할 나위도 없다.  할아버지의 장녀 자선 고모와 차녀 자원 고모가 태어났을 때, 김제 죽산에는 아예 초등학교도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자선 고모는 전주에 있던 이모님댁에서, 자원 고모는 옥구에 있던 고모님댁에서 초등학교를 다니도록 유학을 보내셨다고 하니, 할아버지의 자녀 교육열을 알아봄직 하다.  자원 고모는 죽산에 초등학교가 생기자 전학을 가셨다고 하는데, 번드리 집에서 죽산 초등학교까지가 편도로 십 리 길이라서 이를 걱정한 할아버지가, 아예 학교 근처에 집을 사서, 죽동에 사시던 일찍 혼자 된 큰 누님 (고모들의 고모) 과 처제 (고모들의 이모) 를 모셔다가 놓고, 당신의 딸들을 돌보게 했다고 한다.   큰 누님에게는 두 딸이 있었는데, 이름이 자은과 자혜였다고 한다...... 그리고 할아버지께서 적어도 한 달에 한 번씩은 전주와 옥구로 유학간 어린 딸들을 꼭 찾아보셨다고 한다.  자원 고모 말로는 번드리 살 때는 한 번도 지각을 안 했는데, 학교 근처에 살 때는 맨날 지각을 하셨다고 한다.  번드리에서는 우리 할아버지께서 딸들 등교길을 늘 챙겨주셔서였다고...... 이런 할아버지를 둔 덕분에 그 옛날에도, 자선 고모는 기독교 학교인 광주 수피아 여고로, 자원 고모는 전주 여고로 진학할 수 있었다.  그런데 왜 서울로는 안 보내셨을까.   할아버지께서 서울에 올라오셨다가 창경원에서 벚꽃놀이하는 청춘 남녀를 보고 겁이 덜컥 나셨다고 한다.  당시 딸부자 집 아버지의 입장에서 보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당시 시골 양반집에서는 여식을 대학에 보내는 것을 무척 꺼려했다고 한다.  당시에, 자선 고모의 남편이 되는 형부가 '대학 나온 여자들은 첩밖에 할 게 없다' 면서,  자원 고모가 이화 여전에 가려고 원서까지 받아 온 것을 극구 말렸었다고 하니, 정말 격세지감을 느낀다.  


그래서인지, 피아노를 잘 치고 노래도 잘 해서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어하던 첫 딸, 자선 고모를 어느 장로님의 주선으로, 김제에 있는 교회에서 주일학교를  가르치던 그리 넉넉하지 않은 집 청년에게, 18세에 일찍 시집을 보내셨는데, 할아버지께서는 첫사위를 세브란스 의전 (지금의 연대 의대) 에 보내어 의사 공부를 시켰고, 나중에는 일본 동경제국대학으로 유학을 보내서 의학 박사를 만드셨다.  일본 유학을 갈 때, 자선 고모랑 아이들까지 다 데리고 갔다고 하는데, 그 경비를 할아버지께서 다 대셨다고 한다.  우리 집안의 첫 박사였던 서박사님에게 할아버지는 전답까지 주셨다고 한다.  서박사님은 고창 출신으로 처음에는 군산에서 개업을 했다가 나중에 고창으로 옮겼는데 국회의원 선거에 나갔다가 낙선하는 통에 잘 살았던 집안이 다 망했다고 한다.  잘 나가던 의학 박사가 뭐가 모자라서 국회 의원이 되고 싶었을까 ......아들 여섯에 딸 하나, 모두 7남매를 두었는데 집안도 기울고, 서박사님 고모부가 일찍 돌아가신 탓에 자녀들의 고생이 많았다고 한다,   촌수로는 우리 아버지의 조카가 되는 둘째 아들은,  동갑인 우리 아버지와 친하게 지내서 우리 아버지랑 같이 대구 의대에 응시하기도 했고, 나중에 아버지랑 같이 전북대에 합격했지만 가정 형편상 대학 진학을 못하고 군대에 갔다고. 그런데, 군대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결국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고.....자선 고모가 연탄 가스 중독으로 일찍 돌아가셨기 때문에, 큰 딸의 갑작스런 죽음에 충격을 받은 우리 할머니께서도 시름시름 앓다가 그 이듬 해 돌아가셨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자선 고모 식구들을 잘 알지는 못한다.  지금 오렌지 카운티에 아들과 살고 있는 혜옥이 언니와 근래에 두어 번 만났고, 혜옥이 언니가 세원이 고모한테 준 하얀 가방을 아직도 갖고 있다.  그런데, 우리 할아버지께서는 일본에 있는 딸과 그 식구들을 위하여, 그 당시엔 구하기 힘든 찹쌀로 만든 인절미를, 번드리 집 온돌에서 말려서 일본으로 보내실만큼, 자식 사랑이 지극한 분이셨다고......    


자원 고모 남편인 둘째 사위도 세브란스 의전을 나와 일본 경도 제국 대학에 유학하여 의학 박사가 되었다. 조박사님댁도 가난했다고.  조박사님께서 졸업할 무렵, 조박사님 형님이 패혈증에 걸려 병원에 입원했을 때, 우리 할아버지께서 입원비도 내주시고 양복도 맞춰주셨다고 한다.   조박사님은 전남 영광에 개업을 하셨는데,  개업한 후 돈을 모아 혼자 일본 유학을 떠나셨고, 그동안 자원 고모는 시댁과 친정에서 자녀들과 지냈다고.  자원 고모에게는 맏딸이 있었는데 일곱 살 때 이질에 걸려 죽고, 아들 하나 딸 둘, 이렇게 세 남매를 더 낳으셨다. 아들은 얼마 전에 돌아가시고,  큰 딸은 시카고에, 작은 딸은 목사님 사위와 함께 자원 고모를 모시고 오렌지 카운티에 살고 있다.  자원 고모는 1971년에 미국에 오셔서 손 아래 고모들이 미국에 오는 것을 많이 도와 주셨다.  나는 지금 사촌 형부 목사님의 권고에 따라, 간략하게나마 우리 최씨 가문의 역사를 쓰고 있다......  형부 말씀에 따르면, 우리 최씨 집안은 개화기에 일찌기 복음을 받아들여서 자녀 교육에 힘쓴, 정말 뼈대 있는 가문이란다...... 그래서 후손을 위해 기록을 남겨 놓아야 한다고 하셨다......  이 블로그를 시작한 목적은, 우리 동생들과,  우리 아들 여호수아,  또 앞으로 태어날 우리 조카들을 위해, 우리 아버지는 이런 분이셨다는 것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어서였는데, 쓰다 보니까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 그리고 고모들 얘기까지 다 쓰고 있다......    


셋째딸 자현 고모는, 단지 목사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정말 아무 것도 없는 목사 사위한테 시집을 보내셨다고.......  그래서, 할아버지께서는 자현 고모댁 생활비 일체뿐만 아니라, 목사 사위의 일본 유학비까지다 대 주셨다고 한다.  자현 고모네가 만주로 이사갈 때는 원이 고모랑 호선 고모도 같이 딸려서 보냈다고 한다.

신사참배를 거부하던 목사 사위가 선교사집 앞에서 일본 헌병한테 붙잡혀서 옥사한 것은 해방을 바로 코 앞에 앞둔 1945년 8월 1일이었다...... 자현 고모와 목사 사위는 아들 둘에 딸 하나, 세 자녀를 두었는데, 막내 아들은 유복자였다.  목사 남편을 잃은 자현 고모는 아이들과 번드리 친정으로 들어와 살게 되었다......  자현이 고모 와 다른 고모들의 얘기는, 사연이 많으므로 나중에 더 쓰기로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