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 철미의 이야기 /아버지, 최세훈

할머니의 기도

최철미 2013. 12. 15. 19:37

1935년 5월 20일 온양온천에서, 아버지를 안고 있는 우리 할머니 



우리 할머니, 최신애 권사님...... 우리 아버지의 말처럼, 일생동안 열 한 명의 자녀들을 낳고 기르는 일과, 기도하는 일에만 힘쓰셨던 할머니...... 내 어릴 적 기억은, 할머니께서 한글과 천자문을 깨우쳐 주시던 서너 살 때로부터 시작된다.  늘 두툼한 붉은 성경책을 머리맡에 두고 읽으시던 우리 할머니의, 깊은 한숨처럼 배어 나오던 찬송가 소리...... 할머니의 손을 잡고 다니기 시작했던 동네 교회 주일 학교의 기억이 생생하다.


장로님 할아버지를 일찍 여의시고, 열 한 남매 뒷바라지에 등골이 휘셨을 우리 할머니.....

눈이 펑펑 오는 겨울날 새벽에도 초롱불을 들고, 시아버지 장로님이 세우신 교회에서 새벽 기도를 거르지 않으셨다는 우리 할머니. 열 한 남매를 위해 한 사람 한 사람 이름 불러 가며 기도를 다 마치기도 전에, 할머니를 따라 왔던 강아지가 기다리다가 지쳐, 할머니의 신발을 물고 집에 먼저 가 버렸다는..... 집 텃밭에서 기른 가지랑 호박이 첫 열매를 맺으면, 서슴없이 목사님 댁에 먼저 갖다 드렸다는 우리 할머니.  그 먼 번드리까지 부흥 강사로 오신 미국 선교사님과 일본 선교사님도 기꺼이 집에서 모셨다는 우리 할머니와 할아버지.  일요일 하루는 꼭 한 끼 씩 금식하며 기도하셨다는 우리 할머니.  방송국이라는 별천지에 일하러 간, 기도로 간구로 얻은 소중한 외아들이, 세상 사람들과 어울리느라 술 담배를 시작하는 것을 보며, 주야로 금식하며 눈물로 기도하셨다는 우리 할머니...... 우리 아버지께서도 말씀하셨었다.  "우리 어머닌, 방탕한 어거스틴을 위해 눈물로 기도하던 모니카" 라고.   훗날 참회록을 쓴 아들 성 어거스틴을 위해 눈물로 금식하며 기도하던 모니카의 눈물을 보다 못한 주교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눈물로 기도한 자식은 절대로 망하지 않는다." (It is not possible that the son of so many tears should perish.")


우리 할머니의 기도는, 이렇게, 방송국이라는, 세상적으로 어지러운 환경을 견뎌낼 수 있는, 아버지의 신앙의 보루와 방패가 되어 주었다.   하지만, 할머니께서는 내가 만으로 다섯 살이 되던 1969년에 노환으로 돌아가셨고,  우리 아버지께서 존경해 마지않던, 황광은목사님께서도 1970년에 47세의 나이로 돌아가셨다.  황목사님께서는 '난지도의 성자'라고 불릴 만큼 고아들을 위해 헌신하신, 청빈한 분이셨고, 아동문학가로 글을 쓰시던 분이셨다.  http://www.cry.or.kr/bbs/list.html?table=bbs_5&idxno=737&page=1&total=213&sc_area=&sc_word=  

http://www.pckworld.com/news/articleView.html?idxno=8640

 목사님께서 쓰신 '개미나라 만세' 라는 동화책을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난다.  부모님의 결혼식 주례, 나의 유아 세례, 할머니의 장례식까지 맡아주신, 우리 아버지의 신앙의 지주가 되셨던 분이시다.  아버지 말씀에 의하면, 황목사님께서 내가 태어났을 때, 나를 위해 수많은 이름들을 성경에서 골라 주셨다고 한다.  이렇듯, 우리 아버지가, 아버님처럼 또 형님처럼 존경하던 목사님이셨다.   그렇게 존경하고 사랑하던 할머니와 황목사님께서 돌아가신 후부터, 우리 아버지의 신앙이 흔들리기 시작했던 것 같다......  무엇보다도, 아버지 옆에는 더 이상, 할머니처럼, 또 황목사님처럼, 아버지를 위해 기도해 줄 사람이 없었다......교회 권찰 감투를 쓰고, 할머니와 아버지가 나가시던 교회에 형식적으로 다니긴 했어도, 새벽마다 대문 빗장 소리가 시끄럽다며, 새벽기도 가는 할머니를 구박하던 며느리에게는, 교회는, 참기름과 고추장을 사러 다니는 장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친어머니는 우리가 어려서 살던 안암동집 집수리를 자주 했었는데, 할머니와 황목사님께서 돌아가시고 난 , 그 무렵에, 안암동 집 안방 벽에 유리로 된 진열장을 넣었다.  하늘색으로 페인트 칠을 한 육각형 목조 진열장 속에 있던, 네모난 조니 워커 병이랑 양주잔들...... 우리 할머니께서 살아계셨더라면, 황목사님께서 살아계셨더라면, 정말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밖에서 마시는 술도 모자라 집에서까지 그 독한 양주를...... 우리 아버지가, 양처 기질이 있는,  또 우리 아버지의 위가 얼마나 약한지를 알고 있는, 현명한 아내를 만났었더라면, 결코 그런 일은 없었을 것이었다...... 아마, 친어머니는, 애들이 자라가면서 표면으로 떠오르기 시작한, 여러가지 크고 작은 여러가지 문제들 때문에, 이미 당신으로부터 멀어져가고 있는 우리 아버지의 마음을, 그렇게 해서라도 잡아보려고 했을 것이다......모든 남자는, 술에 약하다......

 


황목사님께서 돌아가신 후, 새로 오신 목사님을 집에 초대했는데, 그 때 누가 왜 그랬었는지 몰라도 집에 있던 포도주 한 잔을 드렸다고 한다.  새로 오신 목사님께서는 미국 유학을 다녀오신 분이셨는데 포도주 맛이 좋다며, "이거 어데서 삽네까?" 하셨다고......  이 일로 인해서 시험에 든 아버지는, 그 날 이후 다니던 교회를 멀리 하기 시작했고,  그 무렵부터, 문제는 많았지만 그래도 잠잠한 편이었던 우리 집안에, 요나에게 내리셨던 뜨거운 동풍이 시작되었다..... 그런데다가, 할머니께서 돌아가신 후, 아버지께서 어머니처럼 의지하던 큰 고모, 자원 누님도 그 무렵에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고, 아버지께서 가장 친하게 지내던 바로 윗 누님, 세원 고모마저도 연이어 미국으로 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