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들의 글모음/작은 딸, 윤경이의 낙서장

낙서장-p.3

최철미 2014. 6. 22. 07:25


오라범.
나는 무엇이고 무엇이어야만 하는지…. 내가 여태까지 껴안고 달려왔던 건 타인의 시선, 타인의 빈껍데기, 타인의 책임 없는 몇 마디 평가… 그런 허접스러운 것들. 인생은 매순간 느끼고, 반응하고, 기뻐하고, 성내고, 잘 울면서 아직 해답을 풀지 못한 수학문제 같아. 현실마저 망각하고, 도피하고만 싶은 바보, 바보가 된 나. 왠지 그 옛날, 때 묻은 소설을 읽다가 엎드려 울던 때가 그리워져. 자정이 넘기를 기다렸다가 겨우 만년필을 들고 골똘하던 갓 넘은 십대. 오로지 동경과 애틋함이 파란 잉크 속에 여려졌나보다. 잊었다가도 가끔 은밀한 모습이 어른거리면 주고받던 모든 것을 차마 내던질 수 없는 게 심정이야. 한참동안 떠돌아다니던 불티 속에서 난 슬며시 눈을 훔치고 말아. 건물 꼭대기서 가만히 등불을 헤아리던 그 따스한 포옹이며, 왠지 마음이 커가는 걸 두려워하던 목소리, 한 가닥 피워 물면 건네주던 낡은 연습장은 오래된 낙서들로 가득 찼었어. 삐죽거리는 입을 얼려주던 손길이 왜 그리 얄미웠는지…. 스스로 자위하길 서로에게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존재라고, 하지만 그저 스치는 사람들이라면 새벽녘까지 빗 거리를 걸어가야 했어. 자주 낙심했지만 한 번이라도 웃어주질 않으면 혼자 힘겨워 어찌할 줄을 모르던 게 사실이었고. 마지막, 그 한 접촉마저 잃지 않으려고 얼마나 자신을 책망했던지. 멀리 떠나가더라도 고향을 잊지 말라며 꽉 쥐어주던 주먹이 서글펐어. 아, 회상이 더럽혀져. 돌아갈 수 있을까. 차라리 허공을 헤매던 그 유리벽 안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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