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운서, 최세훈/아버지의 책, 증언대의 앵무새

대리근무 이변 [안테나 밑 유사]

최철미 2015. 7. 4. 15:41

□ 대리근무 이변

대리투표 싫어하는 야당 못지않게 아나운서들은 대리근무를 기피한다. 반드시 사고가 난다는 징크스가 따르기 때문이다.
환갑집에 초대되어 고량주 한잔에 얼굴이 닳아 오른 아나운서는 라이락 덮인 성공회 골목을 어슬렁거리다 방송국에 들렀다.
『잘됐어 미스터 최, 나 고군분투할 참인데 맡아 주셔야지.』
강찬선 선배는 인플루엔자로 결근한 동료의 대리숙직을 지시했다.
원숭이의 히프같이 발적한 얼굴을 냉수로 식히고 10시 뉴스를 예독 하고 있을 때 공보실장이 방송국을 암행 시찰했다.
토요일 오후라 아래층에서는 외신부원 한 사람이 박카스에 타도되어 있었고 꽃을 좋아하던 그 분은 계단을 오르다 화분을 깨뜨려서 불쾌지수 더욱 상승.
『어사 출도야!』외치는 소리에 벌떡 일어나 빠져나가려는 아나운서를 공보실장은 출구에서 막았다. 절대 절명, 예독 하던 뉴스원고를 빼앗아 뒤적이면서 알코올의 향취를 음미(?)하던 상관은 노한 걸음걸이로 말없이 떠났다.
오오 하느님 나를 버리시나이까?
지옥의 초인종처럼 전화벨이 울렸다.
준절히 꾸짖는 관리국장의 목소리, 그리고 자정 넘어 이운용 국장이 출근했다.
변성기 소년의 목청 같은 부우저가 국장실로부터 부욱 울렸다.
주독으로 빨개진 그 분의 딸기코를 보자 다소 마음이 놓였다.
진상을 청취한 방송국장은 뒷짐을 지고 오락가락 하면서『에잇 참』『에잇 참』만을 연발했다.
혼신의 정력을 기울여 10시 뉴스를 깨끗이 마칠 때 술은 이미 깨어 아나운서는 창백해 있었다.
『술 먹고 어떻게 뉴스를 해!』하는 목소리에 필사의 저항을 했던 것이다.
취중 근무사건이 불문에 붙여진 다음 날 강찬선 선배는 귓속말을 하고 껄껄 웃었다.
『편리하지? 얼굴이 검어서 말야, 난 그날 밤 대폴 석 잔이나 마셨다구…』
1957년의 어느 여름밤 1년 개음의 선배가 기록을 유지하러 나간 뒤 홀로 남겨진 아나운서는 대북방송 원고를 예독 하고 있었다.
이것도 일종의 대리근무.
on AIR가 가까운 자정 무렵 전화벨이 울렸다.
『경무댑니다. 내일 날씨 좀 알아봅시다.』
고압적인 말씨에 얼떨떨해 있을 때 텔레타이프를 만지던 외신기자 한기욱 씨가 다가왔다.
『전 지금 방송실에 들어가야 하니깐 전활 바꾸겠습니다.』
강한 엑센트, 하이테너로 응대하는 한 기자의 목소리를 뒤로 스튜디오에 들어가는 아나운서의 귀에 이 말 한 마디는 똑똑하게 들렸다.
『…관상대로 알아보시지…』
10분짜리 논설을 마치고 나오니 금방 사이드카를 몰고 온 두 사람의 경무대 경호원이 코브라처럼 성이 나서 달려들었다.
『네놈들 공산당 아니야? 6.25때 뭐 했어?…』
갑자기 불어 닥친 맥카시즘의 폭풍.
그들은 밤중에 신상조서를 꾸몄다.
학살 유가족이라는 진술을 듣고 그들은 좀 누구러지는 것 같았다.
『대통령께서 내일 행차하시는데 날씨 좀 알려주면 안되나?』
안될 것은 없었다. 다만 그 무렵, 만우절도 아닌데 최고권부인 대통령 관저를 사칭하는 죠오크가 많았고, 또 경무대에서 방송국에 일기예보를 알아보는 간접 확인은 처음 있는 일이었던 것이다.
방송운행표를 증거로 제시하며 아나운서는 전화가 걸려 왔을 때의 급박한 상황과 텔레타이프 곁을 오래 비워둘 수 없었던 외신 기자의 의무를 차근차근 브리핑했다.
또한 전국의 날씨를 딕테이트한 10시 이후에는 관상대에서 작성하는 기상도가 달라졌을 것이라는 보충 설명에도 그들은 완강했다.
관상대 직통 전화 앞으로 안내된 그들은 일기예보의 가변성을 확인했다.
그러나 경무대 전화에 무조건 습복해서 고분고분하지 않은 것은 평민의 큰 죄, 경호원 하나가 침을 탁 뱉으며 말했다.
『내일 경호실로 출두하시오!』
밝은 날 호구를 찾아가야 한다는 불안한 유예 보다는 차라리 즉결 심판을 바란 우리들은 무저항의 예스맨이 되어 그들의 횡포를 견디기로 했다.
한 시간이나 긴 설유를 늘어놓은 그들은 공갈 한 마디를 던지며 우쭐대고 나갔다.
『다시 그러면 이적죄로 다스리겠오!』
4.19가 지난 뒤 버스 뒷자리에 쭈그리고 앉은 비 맞은 참새처럼 초라한 사람의 얼굴에서 아나운서는 그 날 밤의 경무대 경호원을 인지했다.
『날씨가 좋죠?…』
빙그레 웃는 아나운서의 말뜻을 그 쫓기는 민주반역자는 새겨듣는 것 같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