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운서, 최세훈/아버지의 책, 증언대의 앵무새

리퀘스트의 이창 [안테나 밑 유사]

최철미 2015. 7. 4. 15:42

□ 리퀘스트의 이창

일방통행이던 라디오가 리퀘스트의 문을 넓히자 청취자는 이를 또 교신의 구름다리로 삼았다.
우표를 붙이지 않아도 되는 그 음향 화된 편지는 감상적인 멜로디로 포장되어 원시감정을 자극한다.
이 멜로디의 편지가 하늘로 날아오른다는 신비… 더구나 그 내밀한 사연을 우리만이 공유하고 있다는 애틋한 연대감….
전달 효과는 100퍼센트로 고조된다.
그리하여 사연 실은 희망 곡은 때로 월하빙인이 되고 때로는 못 잊는 사람들의 별리를 무너뜨리는 사랑의 가교가 되기도 했다.
부산 놀웨이 병원에서 좌측 늑골을 절단한 환자 하나는 연상의 놀웨이 여인의 자애로운 간호에 회복이 빨랐다.
임기를 마친 나이팅게일은 울면서 돌아갔다.
늑골이 나온 환자는 이제는 백야의 나라 백인의 여인에의 그리움을 앓게 되었다.
그의 열병의 사연 실은「추억의 멜로디」가 방송된 뒤 이 환자는 동시 녹음의 테이프를 놀웨이로 발송했다.
극지로부터 회신이 왔다.
「라디오·놀웨이」의 비슷한 프로그램을 동시 녹음한 테이프, 번역은 필요 없었다.
사랑은 음악과 함께 국제어가 아닐 것인가?
자기 테이프를 돌려 보며 머언 먼 사랑의 자장이 안타까운 환자는 밤새 울었다.
밤새 울었다는 사연도 on AIR된 것은 물론이다.
리퀘스트·프로그램은 깊이 매장된 슬픔을 채굴해내기도 했다.
프로듀서로 전향한 임동순 아나운서는 저 유명한 심야의 통공사건의 주역,「희망음악회」가 방송된 다음 밤늦게 레코드 실을 노크한 그는 몹시 우울해 보였다.
『희망음악회의 테이프 좀 다시 들어 봐도 되죠?』
녹음기에 흡수된 듯 귀를 모르고 같은 부분을 세 번이나 듣던 그는 그 자리에 엎드려 엉엉 울었다.
뼛속을 울려 나오는 통곡은 동이 틀 때까지도 멎지 않았다.
가슴 깊이 똘똘 뭉쳐진 비밀한 슬픔을 어떤 멜로디의 사연이 촉발했던 것이다.
애환의 교차로였던 리퀘스트·프로그램에서 사람들은 슬픔의 공통인수 쪽에 경사하게 마련이다.
「희망음악회」의 한 동안의 호스테스는 문복순 아나운서, 헤렌 문은 문화영화에 주연했던 희랍 미인으로 구김살이 없었다.
제 5 스튜디오에서 녹음을 하던 어느 날 미스 문은 갑자기 울음을 떠eM렸다.
NG를 뭉개고 다시 녹음기를 돌리는데 다시 그 사연에 이르자 미스 문은 오열했다.
『…최초의 교사이며 최고의 교사인 어머니…저는 길 잃은 양, 어미 양을 그리며 가파른 언덕에서 쓰디쓴 마른 풀을 뜯습니다. 어머님…어디 계시다고 말씀해 주세요, 어디로 오라고 일러 주십시오.』
외로운 실향사민의 딸이 이산의 쓰라림을 허공에 부치는 편지에 헤렌 문은 자신을 대입시켰던 것이다.
녹음은 중단되고 몰려든 사람들을 헤치고 나선 장기범 방송계장은 프로듀서를 향해 웃는 얼굴로 호통을 쳤다.
『당신은 아나운서를 울리기만 할꺼요? 다시는 그런 글 쓰지 마시오.』
눈물을 거둔 문복순 아나운서는 심연처럼 갈아 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해요. 다시 합시다. 울지 않을께요….』
그러나 억눌린 슬픔은 습기가 되어 목소리에 흠뻑 배어 있었다.
스피드를 숭상하는 3S시대의 바람이 불어오자 엽서를 통한 간접적인 방식보다는 전화를 통해 희망 곡을 청하는 즉달적인 방식―텔레폰·리퀘스트가 각광을 받았다.
목소리를 전한다는 직접성, 지금 울려나온다는 현재성을 젊은 세대들은 편애하는 것 같았다.
민간국의 리퀘스트 담당자 하나는 경영학 석사과정을 마친 근시안의 소양인.
가요 곡 프로그램을 과학적(?)으로 관리하고 있다.
수위들의 순찰함 속에 누드 한 장을 그려 넣고『노크하고 들어오세요!』라는 주의사항을 첨가하는 등 기발한 재주꾼인 그는 자기소유의 레코드에 이름이나 싸인이나 도장을 찍어 놓지 않고 안경을 그려 넣는다. 눈이 나쁜데서 오는 콤플렉스는 아닐까?
총천연색 레코드 자켓 위에서 밝게 웃는 가수의 눈동자는 그의 손에 들어와 보안기구로 폐색되고 비로소 그와 동류가 된다.
『저어 신청곡은요, 임선하가 부른 <뉘우쳐 봐도>』
『네! 준비하겠습니다.』
『그런데요? 임선하의 얼굴이 어떻게 생겼어요?』
아나운서는 당황했다. 가수의 모습을 부지도 그 순간 프로듀서는 두겹 유리창 밖에서 레코드 자켓을 쳐들었다.
『아 임선하 씨는 안경을 끼고 있습니다….』
전류로 바뀐 음성이 빛의 속도로 하늘을 나는 발사대― 공중선 밑에 기생하는 인간들은 이야기를 남기고 그 이야기는 세월 속에 묻혀 발굴을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