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운서, 최세훈/아버지의 책, 증언대의 앵무새

아베베의 선조 [막뒤의 삐에로 (下) ]

최철미 2015. 7. 4. 15:44

□ 아베베의 선조

한희동 씨가 선배 윤용로 씨와 숙직을 했던 어느 겨울 일요일 아침, 자명종이 울린 다음에도 두 사람은 꿈의 미로에 빠져있었다.
종교음악이 거의 끝날 즈음, 수위가 깨우는 소리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그들은 스튜디오까지 반 나체 경주, 1착은 윤용로 선배, 2착은 물론 한희동 씨, 하몬드·올갠의 장엄한 선율에 맞추어 이 지참조는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이윽고 토끼 눈깔 같은 빨간 CUE,『이상으로 종교 음악을 마칩니다.』했으면 간단히 넘어갈 걸 윤용로 아나운서는,
『지금까지 종교음악으로…』하고 나니 곡목을 부지도, 따라서 입이 완전 동결, 옆에 섰던 기민한 한희동 씨는 응원단의 구호처럼 급하게 혀를 굴려『오소레무니스』,
윤용로 씨는 얼른『…를 보내드렸습니다.』하고 배드민턴처럼 받아 넘겼다.
이 입체방송을 비웃듯 종교음악 레코드의 라벨에는「바흐」라는 금박 글씨가 또렷했고 긴장이 풀린 선후배는 연쇄반응으로 마주 보며 커다랗게 하품을 하고 있었다.
하품이란 일종의 신진대사라던가.
안개 자욱한 봄날 아침, 체내에 산소를 공급하는 그 불수의 운동의 커다란 음향을 하늘로 날려 보낸 임택근 아나운서는 시말서를 썼다.
입이야 물론 가리고 했지, 그런데 소리가 고스란히 on AIR...ON AIR.
이 하품을 깨무는 무리한 각성이 지겨워 잠을 깨우는 수위에게 호통을 친 뱃장 좋은 아나운서도 있었다.
『나 오늘 당장 사표 낼 테니 내쳐 자게 그대로 두슈.』
광복절 전야 최계환 아나운서와 또 다FMS 미스터 최는 기념일의 추억들을 발굴하다 늦잠이 들어 내쳐 자버렸다.
사표를 낼 뱃장이 없는 두 사람은 3층 스튜디오까지 맨발로 뛰었다.
맨발로 뛰는 거야 아베베 보다 우리가 먼저지, 그런데 1착은 맡아 놓고 선배 차지였다.
「아침 음악」의 선율이 아무리 유려해도 이 숨 가쁜 주자들의 귀엔 라프소디…행차 뒤의 슬픈 나팔이다.
그 날은 베토벤의「환희」에 실어 문예계장 최요안 씨가 쓴 경축 송을 낭독해야 했는데 시간을 놓쳐버린 고뇌의 2인조는 묵도나 할 수 밖에 없었다.
수의 걸치듯 헐렁한 파자마 바람의 최계환 씨는 형량이 궁금한 죄수처럼 체념조로 물었다.
『몇 분 늦었우?』
엔지니어는 언도하듯 내뱉었다.
『8분 15초!』
참으로 기묘한 우합이었다.
광복절 아침, 8분 15초 지각한 이 운명의 사고를 최 선배는 어물어물 넘기려 했다.
해방 직후의 혼란기라면 모르지만 벌써 12년인데…불안한 가을날이 1주일이나 지났다.
꼭 여드레 되던 날 장기범 계장의 홍안은 노여움으로 더 붉어있었다.
『8.15에 늦는 사람들이 어디 있어? 당신들은 식민지로 유배감이야!』
일주일의 유예를 깨뜨린 것은 송신소의 주간 보고, 사고를 깔고 앉았던 최 브라더즈는 늦잠 자고, 알리지 않은 2중의 죄과를 한 장의 시말서 위에서 빌고 또 빌었다.
아나운서 10년이면 3년은 무료숙박, 입심으로 소화해 버린 원고의 누적량은 천정까지 닿는다.
지각 3분의 최소 기록을 가진 장기범 계장은 숙직근무를 솔선 수번하려 했다.
2월 26일, KNA기가 납북된 날이 그의 첫 남산 호텔 무료숙박일, 보조 아나운서 미스터 최는 긴장했다.
오전 1시 30분, 내신과 외신의 소용돌이에서 빠져나와 모두들 허탈해 있을 때 천성의 보스 장기범 씨는 주조정실에 주연을 약설하고 숙직원들을 위로했다.
『자 내일 아침…아니 오늘 새벽에 자알들 부탁해요.』
따끈한 것으로 체내 외 독소를 씻어 내리고 모두들 뿔뿔이 잠자리에 들었다.
『몇 분에 깨워 드릴갑쇼?』
한밤의 감로로 불쾌해진 수위들의『그런 문입쇼』『저런 문입쇼』도 한결 부드럽고 달콤하게 아물어졌다.
멀리서 때 늦은 초계 비행의 굉음이 울리다 사라졌다.
누군가 이불을 잡아당겼다. 지금은 여학교 교사로 전직한 문약한 외신기자의 어슴프레한 실루엣, 갸날픈 목소리…
『오늘은 방송 안 해도 되요?』
퍼뜩 깨어 드려다 본 야광침은 5분 전 6시, 뛰어내려다. 뛰었다.
그러나 아래층 조정실의 불 꺼진 창에는 아직도 어둠이 가득, 『염려 말굽쇼』하던 수위는 드르렁 드르렁 수면 중, 스튜디오를 반환점으로 다시 뛰었다.
풋술에 떨어진 기술자가 깨어나고, F.M이 동작되고 아티네이터와 함께 불이 켜진 조정실은 그대로 아수라….
전화벨은 제창하듯 있는 대로 울리고, 당황한 송신소는 비상용테이프를 걸었는데 새벽부터 가요곡이 떠엉떵 거리며 울려나왔다.
『카우·보이 카우·보이 카우·보이 황야를 달려가는 아리조나 카우·보이…』
말채쭉 보다 더 아프게 전화를 타고 온 윤길구 방송과장의 목소리는 아나운서를 찰알싹 때렸다.
『아니 납치된 건 KNA요? KBS요? 방송계장 바꾸시오!』
전원일치 꿈나라로 끌려간 그날 아침, 6시 5분의 사과 아나운스 멘트로 방송은 정상화되었으나 3분에서 35분으로 지각 기록을 갱신한 장기범 계장은 하루 종일 무겁게 침묵했고, 그의 첫 무료숙박을 잘 보조하지 못한 미스터 최는 씻지 않고 먹지 않고 포로처럼 꾸겨져서 길고 긴 하루해를 대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