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운서, 최세훈/아버지의 책, 증언대의 앵무새

곡차를 싫어하는 마이크로폰 [막뒤의 삐에로 (下) ]

최철미 2015. 7. 4. 15:46

□ 곡차를 싫어하는 마이크로폰

풍년 든 해의 정원 초하루, 신인 아나운서 송석두 씨는 사무실을 곁눈질하며 곧장 스튜지오로 출근을 했다. 도소주 몇 잔에 얼근해진 그의 얼굴은 동구라파처럼 적화되어 있었다.
9시 15분의「명곡감상」을 자원한 그는 얼얼한 손끝으로 디스크를 돌렸다.
드볼작의「신세계」… 핸커치프가 젖는다는 제 3악장 라아르고가 끝난 다음, 33회전의 그 LP는 100번이나 부우욱 북 제자리를 맴돌았다. 무슨 군축협상인가? 제자리걸음을 하게.
제 9스튜디오로 직원들이 우루루 몰려갔을 때 송 아나운서는 엎드려 기도하고 있었다. 평화롭게 극히 평화롭게….
『아멘』할 겨를도 없이 끌려 나와 찬물로 얼굴을 식혀야만 했던 그는 작곡가에게 책임을 전가했다.
『음악이 참 황홀 합디다요! 그래서….』
원단의 1년 지계를『그래서』모래 위에 세운 송석두 씨는 결국 신세계를 찾아 구대륙을 떠났다.
우리 애인 마이크로폰이 곡차를 매우 싫어하심을 왜 미처 몰랐던고.
돈이 10원 있으면 버스를 타지 않고 대포 한 잔 마시고 소요한다는 애주가 유창경 아나운서는 고달픈 문학청년, 부조리와 공허와 좌절감을 알코올로 문지르려 했다.
아담이 선악과 깨물 듯 그는 이 타부의 음료를 방송 전에도 홀짝거렸다.
어느 날 8시 뉴스를 꼬부라진 혀로 허둥댈 때, 집에서 라디오를 듣던 강익수 계장은 공중전화로 달려갔다.
『아나운서실? 유창경씨 좀 바꿔 주시오.』
『네! 뉘시오? 제가 바로 남산의 유 박사 올시다.』
『그러세요? 방송 자알 들었습니다.』
『자알』이라는 가시 돋친 엑센트에서 상사의 목소리를 직감한 유 박사는 후다닥 정신을 차려 어조를 가다듬었다.
『계장님이세요? 저 술 안 먹었습니다.』
수화기를 동댕이친 강익수씨는 그 길로 씨근벌떡 남산에 올랐다.
『술 안 먹고도 혀 꼬부라지는 사람 나가시오! 숙직은 내가 할 테니 푸욱 쉬세요!』
『네에, 나가지요 나가구 말구요.』
항거하는 눈빛으로 되돌아 선 우리 유 박사는 터덜터덜 남산을 내려가 서울특별시를 소요했고 이튿날 출근정지 처분을 받은 그는 며칠 동안 집에서 푸욱 쉬었다.
민간 국에 복직한 우리 유태백은 크리스마스이브의 숙직 근무를 성지 순회하듯 대폿집을 순회하는 것으로 스타트했다.
이취한 그의 근무 대행을 위해서 성탄 휴가를 즐기던 치프·아나운서가 달려 나왔고 수위에게 끌려 나간 그는 일류미네이션에 덮인 거리를 또 소요하려 나갔다.
체질개선을 위해 보내진 지방 국에서 밤 11시 10분의 콜·사인을 넣으며『지금 시각은 11시…정각입니다.』하고 푹 고꾸라져버려, 징계위원회에서 금주서약서를 썼다.
술을 먹지 말라는 금주가 아닌「금주(今週)의 노래」가 건전가요 보급을 위해 신설되었다.
5분짜리 가창지도 시간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 미스 김은 합창단의 하밍 속에 자신만만, 노랫말을 읽었다.
『…문경새재 박달나무 방망이로 다 나간다』를 박력 있게 뚝뚝 끊어,
『문경새재 박달나무 방망이로다앗 나가안닷!』
『금주의 노래』에는 어사가 출두한 셈인가.
김양에게 경부선 관광이나 시킬 것이지, 방송국의 무임승차권은 상관들의 포케트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