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운서, 최세훈/아버지의 책, 증언대의 앵무새

냉한삼두의 이사 [막뒤의 삐에로 (下) ]

최철미 2015. 7. 4. 15:47

□ 냉한삼두의 이사

장비에게 가마를 태운 사람은 이밖에도 많다.
타계한 이순길 씨는 종교합창 시간에 들어가「역려과객 같은 사나이」를『역려과,객같은 사나이』로 분절해 버려 혼성합창을 소성 합창으로 만든 일이 있다. 정말 역려했던 그는 요단강에 투신해 버렸지만 성경 구절 안 읽기 다행이지『예수의 처음 행하신 기적』도 그랬다간 일곱째 계명에 NOT가 빠져 불살리운, 문제의 바이블처럼 될 뻔 했다.
「물이 포도주로 변하는」기적은 없었지만 방송국에는 때때로 이사가 일어났다.
아시아 영화제에 린·다이를 추모하는 특별상이 제정되었을 때 폐막식 담당 송영규 아나운서는 농구 중계처럼 스피디하게『다음에는 린·다이 추모상, 지금 중국 고유의 의상을 걸친 린·다이 양 무대위로 오르고 있습니다』라고 즉시묘사, 린·다이 추모상에 린·다이? 아니 그럼 그 박명의 가인이 나자로처럼 기사회생을 했단 말인가?
죽은 사람을 다시 살릴 수는 없었으나 죽은 시간은 되살아났다.
추계 프로그램 개편으로 15분의「야담」이 20분으로 늘어난 날, 밤에 출근한 숙직 아나운서와 엔지니어는 시간 연장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가랑잎이 서걱이는 목소리로 최종선옹이 옛 얘기를 한참이나 펼쳤을 때 창밖의 기술자는 목 자르는 시늉을 했다. 끊으라는 신호. 소개 아나운서 미스터 최는 무자비한 길로틴의 흉내를 해보였으나 침착한 얘기꾼은 탁상 위에 풀어놓은 튜가리스를 흘낏 보고는 회고에 열중. 「일장춘몽」이라는 제목이었는데 아직도 꿈은 가경에 있었다.
『영감님이 착각 하신게로군』생각하며 원고에 눈을 주었다.『했습니다』의「다」만 나오면 급정거를 시킬 속셈으로….
양면괘지에 쓴 달필은 한글을 간소화 하자던 이승만 박사와, 지당하옵신 말씀이라고 법안까지 만드신 어용학자가 좋아 할 그런 맞춤법이었다.
마침내『…하얏습니다』하나를 찾아내어 대기태세 만전, 속도위반 택시 잡는 경찰백차 골목길에 복병처럼 숨어있듯 기다리다 갑자기 나꿔챘다.
『이상으로 최종선 씨의 야담을 마칩니다.』
인자하시던 노인장은 화를 벌컥 냈다.
『이 사람아 20분이야! 20분!』
냉한삼두, 죄인처럼 손을 부빌 때 눈치 빠른 기술자도 꾸벅하며 다시 CUE….
『계속해서 말씸 디리겠습니다.』
노여움으로 거칠어진 숨소리를 최옹은 뿜었다.
소생한 시간이 다 끝나자 머리 숙여 사과하는 아나운서에게「남의 허물을 오래 기억하지 않는다」는 채근담 한 귀절을 인용하며 최옹은 웃으면서 나갔다.
채근담이 사람 이름인 줄 알았던 아나운서에게 보여주고 싶은 그 때 그 파안….
채근담의 작자 홍자성이 웃는 것도 그랬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