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 철미의 이야기 /철미의 수필

벗에게

최철미 2013. 12. 10. 15:28

국민학교 일 학년 때부터 단짝이었던 네가, 며칠 후면 이곳에 온다는 것이, 너를 십 년 만에 다시 만나게 되리라는 것이, 아직도 믿기질 않는구나.  학교가 끝나면 학교 앞 호떡집, 떡볶이집으로 다니며 수다를 떨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집안 사정으로 지방에서 여학교를 다니게 된 나는, 서울에 있는 네게 무슨 펜팔이나 하듯 편지를 자주 보냈었지. 대학생이 되어 다시 상경한 내가 맨 처음 서울에서 찾은 사람은 바로 너였지. 네가 꼬박꼬박 보내주던 너희 학교 학보를 우리 학교 과사무실에서 받아보며, 마치 네 편지 보듯 고대 학보를 읽곤 했었다.  내가 여기 오는 비행기를 타기 전날, 나는 너와 종로의 한 찻집에서 만났었지.  사방에 흰눈이 소복히 쌓인 날이었다. 아, 그렇게 소담스레 쌓인 흰눈을 본 지가 언제였던가 싶구나.  그때만 해도 난 널 곧 다시 만나게 되리라 생각했었단다. 그런데, 네게 쓰는 편지도 뜸해지다가 나중엔 아예 쓸 말이 없어져서 더 이상 보내질 못했단다.  이곳의 숨가쁜 일상은, 내 아련한 추억을 늘 뒷전으로 밀어내곤 했거든.  그러다 작년엔가 네 편지가, 국민학교 적부터 보내온 네 편지가, 가득 들어있는 상자를 다시 찾아내고는 네게 다시 편지를 쓰기 시작했지.  그래, 난 네 편지들을 무슨 보물 단지나 되는 이곳까지 모두 가져왔단다.  다행히도 네 주소가 바뀌질 않아 다시 연락이 되었고, 다음 주면 널 다시 만나게 되는구나.  


 네가 오면 어딜 갈까?  멋있고 기억에 오래 남는 그런 곳이면 좋겠는데...... 선물이라도  하나 사 줘야 할텐데, 뭘 사주나? ...... 오랫만에 만나는데 뭘 입고 나가지?  좀 덜 늙어보여야할텐데......  아이구, 웬 흰머리가 이렇게 많아졌담?  나는 요사이 부쩍 늘어가는 흰머리를 하나씩 뽑아내며, 다분히 세속적인 이런 걱정에 초조해지기까지 한다.  넌 지금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여행 가방 싸느라 정신 없겠지, 아마.    


 내가 기억하는 넌, 경양식과 팥빙수와 아이스크림을 좋아하던 소녀였는데......지금은 얼마나 변했을까?  지금은 뭘 좋아할까?  넌 내가 글쟁이가 될 줄만 알았다고, 회계사가 되다니 웬일이냐고 했지.  이곳의 척박한 언어 문화에 눌려, 어눌해질대로 어눌해진 지금의 내 모국어가, 네게 공연한 반감이라도 주게 되면 어떡하나?  행여 서로의 변한 모습을 보고 실망하지나 않을까?  이런저런 상념에 가슴이 설레온다.  

 

 아무 걱정거리가 없던 어린 시절에 만난 우리.  꿈많던 사춘기 소녀 시절. 입시공부 하느라 여념없던 여고 시절. 이념과 현실의 괴리에서 방황하던  대학 시절. 직장 구하고 짝 찾아 새 가정을 꾸미느라 이십대 후반을 서둘러 마감하고, 이제 삼십대에 들어선다. 아, 이젠 우리도 우리가 그렇게 경원해하던 '기성세대'가 되어가고 있는 걸까?  수년 전까지만해도 나를 '언니'나 '누나'로 불러주던 동네 꼬마들이 이젠 한결같이 "아줌마"로 호칭 통일을 한 것을 보면, 나이는 못 속이는가 싶다.  우리는 할머니가 되어서도 서로에게 편지를 쓰리라.  그때쯤엔, 인생의 뒤안길에서 지나온 삶을 넉넉히 관조하는 글을 쓸 수가 있으리니.  그러려면, 우리, 삶의 소중한 순간순간들을 아름답게, 열심히, 후회없이 살아가야지.  우리 꼭 그러자꾸나.   


9-14-94   


SF 한국일보 금문교 



'딸 철미의 이야기 > 철미의 수필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자기 소개서  (0) 2014.04.20
감사의 이유  (0) 2014.01.29
가지고 떠날 수 있는 것은   (0) 2013.12.10
미국 시골 회계사가 말하는 성공의 비결  (0) 2013.12.10
그 아이  (0) 2013.12.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