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십 대 후반 쯤 되어보이는 John과 그의 아내는 대학에 다니는 딸 하나를 데리고 두어 달 전까지 우리 앞집에 살았었다. 서로 바쁜 탓에 그리 친하게 지내지는 못 했어도 얼굴을 보면 인사도 나누고 안부도 묻고 하는 사이였었다. video tape 모으는 것이 취미라던 John 덕분에 Forest Gump나 백설공주와 같은 영화 tape 도 빌려다 본 적이 있었다. 몇 해 전, John 의 딸 차에 누군가가 spray paint 칠을 해 놓고 도망갔을 적엔 며칠동안 심기가 불편했었다. 'Hate Crime' (증오 범죄) 임에 틀림이 없다고 한탄하던 John 의 식구는 우리 골목에 사는 유일한 흑인 가족이었고, 그 앞집에 사는 나 역시, 백인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두어 달 전 어느 날 밤, John 의 식구는 인사도 없이 살던 집을 떠나야 했다. 밤중에 바쁘게 이삿짐을 실어 나르길래 웬일인가 싶었는데, 그 다음날 아침, 낯선 사람들이 John 의 집을 들락거리며 청소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John네 식구가 일년 동안 집 융자금을 갚지 못해 지난 밤에 강제 퇴거를 당했다는 것이었다. 얼핏, 부동산에 무리하게 투자를 한 탓에 파산 신청을 해야만 했다는 John의 푸념이 생각났다. 그래서, 야밤에 인사도 없이 떠나야 했구나......
며칠동안 앞집만 보면 공연히 울적했다. 못 보던 사람들이 연신 들락거리며 청소를 해 대는가 싶더니, 이내 부동산 회사에서 나와 'For Sale' 표지판을 세우고 갔다. 부동산 중개인들과, 그들이 대동한 집 보는 사람들이 가끔씩 와서 집 구경을 하는 모양이더니, 표지판에 'SOLD' 이라는 sign 이 하나 더 붙은 것을 보면 집이 팔린 모양이다. 오늘 낮에 수도 회사 트럭이랑 전기 회사 트럭이 왔다간 것으로 미루어 곧 새 주인이 이사올런 지도 모르겠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 동산에서 쫓겨났을 때, 지니고 갈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내가 이 세상을 떠나게 될 때, 가지고 갈 수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John네 식구처럼 보따리 보따리 이삿짐 트럭에 싣고 떠날 수도 없으려니...... 내가 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누군가가, 내가 살던 이 집, 이 자리에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살아갈 것이다.
갑자기, 앞집 단풍나무에 막 들기 시작한 단풍빛이 더 고와보인다.
9-23-96
SF 한국일보 여성의 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