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운서, 최세훈/아버지의 수필 모음

얼룩소의 울음소리

최철미 2014. 2. 2. 10:41

 

얼룩소의 울음소리

 

1943년 미국에서 창안된 이른바 인포메이션 플리즈(Information please)가 점령군과 함께 패전 일본에 상륙하자 번안의 명수인 일본 사람들은 이를 재빨리「이야기의 샘」으로 바꿔 1946년12월3일에 방송을 시작했다.

 

퀴즈라는 낱말이 여기서 처음으로 쓰여졌다. 이 패늘 퀴즈는 우리나라에 수입되어「천문만답」이라는 프로그램으로 변형되었지만 간헐천처럼 꾸준하지 못했다. 그런데 실제로 인포메이션·플리즈보다 먼저 한국에 귀화해서 갓 쓰고 담뱃대를 문 것은 Twenty Question였다. 본격적인 오픈·쇼의 원조인「스무고개」는 삼천갑자동방삭을 연상시키는 이름 때문인지 비교적 장수했다.

 

미국 고문관이 처음으로 이 서양 수수께끼의 녹음을 들려주며 이식을 권하자 문제안 프로듀서는 반대 의견을 제시했다.

 

“애들 장난 같고 수다스럽군요. 방송은 적어도 이보다 높은 수준에 있지 않을까요?”

 

그러나 긍지를 꺾고 수준 격하를 시험해 보기로 했다. 간판은「스물의 문」또는「20계단」 따위가 거론되었으나 직역체의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아 타이틀을 현상 모집했다. 그러나 입선자는 없었고 문제안씨의 머리를 스친 삼천갑자동방삭의 전설…마침내「스무고개」로 이름을 붙였다. 이 프로그램은 번창했다. 성명철학은 무기물에도 적용이 되는 것일까? 「스무고개」의 대부 문제안씨는 뒷날 이 퀴즈·프로그램의 패늘로 활약했으니 ‘높은 수준’에 대한 그의 신앙은 완전히 수정된 셈이었다.

 

「twenty Question」이「20의 비」로 다시「스무고개」로 바뀐 타이틀에서 민족성을 엿볼 수 있어서 흥미롭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으나 해방에서 50년대까지 우리나라 방송은 프로그램을 독자적으로 만들어내기보다는 남의 것을 옮기는 이른바 중역문화권에 안주했다고 볼 수 있다.

 

우리한테는 일본이 일종의 묘포나 시험 경작지였다고나 할까. 서양에서 직수입한 프로그램이 일본에서 정착되어 꽃이 피면 우리는 그것을 이식하는 데에 주저하지 않았다.

 

우리나라의「퀴즈 올림픽」의 원전은 바로 일본의「둔지 교실」인데 4·19이후에「퀴즈 올림픽」은「재치 문답」으로 신장개업을 했다.「스무고개」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패늘의 호칭은 ‘박사’였다.

 

「재치 문답」의 바통을 이어 받은 뒤 나는 MC의 영역이 얼마나 넓고 끝없는가를 통감했다. 그 기지와 유우머의 경주는 긴밀한 인간관계의 워어밍 업을 요구했고 사회자의 기술은 장전된 총의 경우, 뇌관을 때리는 격침처럼 날카로와야 했다.

 

캐리커쳐로 연역해서 웃음으로 귀납시켜야 하는 그 논리를 따라가면서 MC는 얼마나 허둥댔는가? 팀 리이더격인 안의섭씨를 주축으로 고 강소천씨의 해맑은 동심, 엄익채씨의 구수한 인간미, 한국남씨의 해학, 신동헌씨의 기상천외, 신동문씨의 봉·쌍즈, 정연희씨의 현실 참여, 이연숙씨의 생활인의 지혜, 윤길숙씨의 상식의 재확인 따위로 분방한 개성의 혼성 합창을 콘덕트하던 MC의 손은 늘 떨렸다.

 

「라디오·서울」의 탄생으로 MBC가 거의 진공 상태가 되고 게르만은 아니지만 ‘대이동’으로 과대 표현되었던 그 잔인한 4월에「재치 문답」의 프로듀서와 MC가 나란히 인사동으로 주소를 옮기자 석별이 아쉬웠던 박사들과 재회도 하고「재치 문답」의 고정 팬을 청취율과 연결시키기 위해서「유모어 대학」을 신설했다.

 

그러나 인사동에는 오라토리움이 없었고 종로 예식장의 분위기는 패늘 퀴즈에 적합하지 못해서 유랑의 무리처럼 떠돌며 이른바 출장 강의를 했다. 아류는 본디 생명이 짧은 것, 꺼져가는 촛불처럼 번쩍하고 스러졌다. 마지막 불꽃으로 기억될만한 것이 있다면 명수대 편이라고 할까?

 

「유모어 대학」이 중앙대학교로 출장 강의를 한 것은 1965년 3월24일, 곧 한-일 협정 반대 데모로 태풍이 예감되는 기상개황 아래서였다. 총장실에 브리핑을 하러 들어간 MC를 임 영신여사는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이 시국에 학생들을 자극해서는 안돼요!”

 

그때의 정국처럼 임 총장은 경화되어 있었다.

 

“공개가 끝날 즈음 패늘들에게 학위를 수여해 주시는 게 이 프로그램의 형식입니다. 어디까지나 조오크죠.”

 

“디그리(학위)? 신성한 아카데미에서 함부로 디그리를?”

 

어나운서는 작전상 후퇴하면서 하여튼 방청해 주십사고 한신처럼 기었다. 대학극장은 초만원이었고 ‘최류탄’, ‘학원사찰’등의 시국 풍자가 돋보여서 였는지 환호, 박수갈채가 일렁거렸다.

 

폭풍 같은 반응을 재우느라 오히려 박수 중지 싸인을 하고 있을 때 임 총장이 게스트의 자리에 초연히 들어왔다. MC의 머리는 총장과 학생 사이로 진자 운동을 하다가 마치 태엽이 꽉 감긴 듯 긴장했다.

 

이어폰을 낀 여장부의 표정은 그러나 아이스크림처럼 서서히 녹았다. 마침내 박장대소…. 분위기는 무르익었다. 독립 운동하던 애국 소녀 시절부터 자연스럽게 인터뷰로 유도했다. 연줄이 타래에서 풀려나가듯 임 총장의 얘기는 거침없었다. 감옥에 갇힐 때마다 면회를 오던 청년과의 로맨스를 박꽃같은 웃음을 머금고 회고할 때 만화가 안의섭씨가 농을 걸었다.

 

“그 청년 혹시 시력이 나쁘지 않았어요?”

 

봇물처럼 터진 웃음…. 임 총장은 그러나 인자하고 너그러운 미소로 답했다. 그리고 패늘들에게 그 신성한 ‘디그리’를 아낌없이 수여했다. 그리고 중대 체육회의 애니버서리였던 바로 그날, 공개방송이 끝나자 임 총장은 다과회의 손님으로「유모어 대학」방송 팀 식구 모두를 특별초청해서 환대를 베풀고 따뜻한 체온을 작별의 악수에 담아 주었다.

 

명수대에서 시내로 들어오자 거리는 삼엄했다. 위수령 발동, 녹음 내용에 가해야 할 자율적 규제가 걱정스러웠다. 테이프를 가위질하던 프로듀서는 한 시간 만에 편집을 끝냈다. 시간은 OK라는 것이었다. 불안해진 어나운서는 테이프를 다시 한 번 녹음기에 걸었다. 그 테이프는 희끗하고 불긋한 얼룩소와 같았다. 시국에 역행하는 발언을 도려낸 자리에 소리 나지 않는 하얀 리이딩 테이프를 붙여 놓았기 때문이었다.

 

묵음-박수-묵음-박수….

 

소리가 나지 않는 부분은 상상에 맡긴다는 그 기상천외의 편집 방식에 펄쩍 뛰자 신인 프로듀서는 혈압이 높아졌다.

 

“와 파이라 하노. 신문도 삭제하모 이래 안되나?”

 

녹음 편집을 신문 제작에 견주는 놀라운 비교 정신을 부드럽게 다스리고 MC는 가위질에 협동했다.

 

창밖으로 무장 군인을 만재한 트럭이 지나가고 있었다.

 

<1982년4월 MBC 가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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