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운서, 최세훈/아버지의 수필 모음

사랑하는 마리아

최철미 2014. 2. 2. 11:02

사랑하는 마리아

『때는 봄, 아침은 일곱 시…이렇게 시작되는 로버트·브라우닝의 시보다는 75분이 늦었습니다만은 아침 이슬에 신의 은총이 빛나는 싱그러운 봄날입니다. 회색의 브라운관에 즐거움을 가득히 펼치는 일요화제의 발송계입니다.』

지난 해 3월22일 아침8시 15분에 방송된「선데이·매거진」의 머릿말 재록이다.

인쇄매체에 늘 뒤지게 마련인 방송이, 하루쯤은 선두주자가 될 수 있었다는 것과 가요계의 우상 하나가 흔들리고 그 도금이 벗겨졌다는 데서 다소는 역사적이었던 그 일요일 아침, 프러듀서 전우중씨와 MC는 불발탄을 매만지는 것처럼 긴장해 있었다.

첫 번째는 시이즌·오픈을 앞둔 실업야구 페넌트·레이스, 두 번째는 미니강좌, 세 번째는 신곡의 엑스포, 그리고 네 번째 코너에 우리는 시한장치를 걸어 놨었다.

코너 사이사이에는 물론, 릴리프로 가요를 곁들이는 진행방식이었지만, 우리는 특별한 녹음 하나를 위해 주말의 오후를 헌납했고, 비밀병기가 된 그 음향을, 떨리는 손으로 자기테이프에 밀봉해 두었다.

하나의 우합이었을까?

지난 주일의 주요 뉴스·레뷰가 그『로버트·브라우닝 운운』의 머리말 다음에 있었는데 우리들이 숨겨 놓은 네 번째 코너와는 질적으로 매우 밀착하는 것이었다.

『3월의 3번째 주간에는 두 얼굴을 가진 야누스의 역사가 많았습니다. 우선 계절이 겨울과 봄 사이를 오락가락하면서 춘설을 내리고 차가운 꽃샘바람을 일으켰습니다. 좌경 중립으로 양다리 외교를 펴던 캄보디아의 시하누크가 실각했습니다. 그리고 낮에는 숙녀, 밤에는 요화였던 한 여인의 죽음과, 그녀가 남긴 핑크·리스트가 회오리바람을 일으켰습니다. 계절이든, 정치든, 사랑이든 정도는 오직 한 길…』

여기 짧막한 코멘트에

『가요도…』
라는 말은 다음의 폭발 효과를 위해서 삽입하지 않은 것이 물론이다.

『그래서 오늘의 첫손님은 오직 한 길로 매진하는 분들입니다. 푸른 하늘에 은 선을 긋는 백구의 제전, 실업야구 페넌트·레이스를 앞두고 한국 야구계의 VIP들이 자리했습니다…』

얘기를 안배하면서도 MC의 머리 한쪽은 무겁게 짓눌려 있었다.

ON·AIR 전에는 대개 질풍관병식으로 얼굴을 익히고 워밍·어프를 해둔다.

네 번째 코너의 증언을 위해 초빙된 작곡가 Y씨는 헤비급의 체구에 날카로운 몽고리언의 터프·가이, 더욱이 유도 2단이라는 예비지식까지 겹쳐 완전히 위압되는 판인데, 그는 의혹과 불만이 범벅된 몸짓으로 스튜디오에 들어가며 다음과 같이 일갈했던 것이다.

『나 좀 이상한 소리 나오면 방송 도중이라도 나가버립니다…』

침을 꿀꺽 삼킨 MC는 미소를 지으려 애쓰면서 신문지로 위장해 놓은 오리지널·디스크의 자켓 한 구석을 단단히 여몄었다.

(만일 퇴장해버린다면?....... 그렇다, 빈 의자를 클로즈업할 수밖에 없겠지)

프러듀서에게 그러한 불안을 눈짓해 놓았으니 이제는 시간을 거슬러 갈 수는 없었다.

야구에 관한 좌담을 마므리면서 우리는 큐·쉬트대로 예고편을 틀어댔다.

『선데이 매거진의 전위적인 미니 강좌, 오늘은 패닉·플레이에 대해 시인 조향씨의 말씀이 있고 다음에는 신곡의 엑스포에 이어서〈마리아의 작곡자는 누구?〉냐는 쇼킹 정보를 파헤친 놀랄만한 스쿠우프가 있습니다…』

점잖으신 슐·레아리스트의 짧은 강의가 진행되는 동안 MC는 방청석의 Y씨를 살피면서 다른 의미의 PANIC에 깊숙이 빠져들어 갔다.

이어서 간주곡도 없이, 형은 시인이요 아우는 작사가라 형전제전의〈노신사〉정두수씨와 트럼피트의 명수자이며 작곡가인 김인배씨가 새 노래를 전시하러 나왔다.

『두수라면 미곡상을 해야 할 이름이군요, 말 두, 지킬 수…』

권투에 비기면 세미·파이널에 잠시 여유를 가지면서 마음을 굳게 다졌다.

새 노래의 전시가 끝나면서 MC는 그 코너의 디저트이자 다음에 올 코너의 스으프를 올렸다.

『〈사랑하는 마리아〉의 표절 시비에 관한 가요인으로서의 의견은 어떠십니까?』

김인배씨는 프레임 밖에 있었고 정두수씨는 애매모호하게 말끝을 흐렸다.

『글쎄요, 그런 소리가 있긴 하던데....』

무궁화 대상 수상자의 말은 그 정도로 끝났다.

다음의 릴리프·송은〈성·버너디트의 종〉, 어쩌면 전투개시의 신호 같은 그 종소리의 인트로덕션을 밟고 작곡가 Y씨는 무거운 걸음으로 카메라 앞에 자리했다.

『진실만을 얘기하세요, 위클리에 보도된 내용을 해명해도 좋구요.』

부드러운 속삭임으로 Y씨가 예고한 퇴장의 위험을 막을 심산이었다.

그 때 위클리는〈사랑하는 마리아〉의 작곡자는 K씨가 아니라 그의 악단에 속해 있던 재즈·피아니스트이며 편곡을 도맡아 왔던 Y씨라는, 이른바 쇼킹 정보를 게재했다. 이를테면 한사람의 영광과 그 영광의 그늘에 가린 말 없는 지주들의 부조리한 생태를 파헤친 셈이랄까.

플로워·디렉터의 숨가쁜 초독에 아랑곳없이 Y씨의 손은 포켓 속의 담배 값을 더듬거렸다. 그는〈백조〉만을 즐겨 피우는 순수한 애연가…그러나 한 대 피울 시간은 없었다.

빠알간 틸트·라이트가 확 켜지면서 방송개시의 큐우를 냈던 것이다.

『마리아의 주인은, 성경에 보면 아리마다의 요셉입니다마는 어린이들도 즐겨 부르는 우리 가요 사랑하는 마리아의 주인은 누구일까요? 그 출산의 경위가 미궁에 빠져 있는 것 같습니다…』

드라머·센터에서 열렸던 리사이틀에서 조영남에 의해 처음 발표되고 이웃나라 일본에서는 10만장의 판매기록을 돌파한 골든·디스크가 과연 적자인지 양자인지 아니면 사생아인지, 질문은 핵심으로 다가갔다.

『주간지는 오보를 한 겁니다.』

Y씨는 담백한 어조로 단호하게 말했다.

그리고 그는 모든 영광을 K씨의 것으로 돌렸고, 그것이 사실이라고 못 박았다.

『K선배가 지금 외유 중인데 이런 물의가 일어나서 몸 둘 곳이 없습니다.〈사랑하는 마리아〉는 K선배가 작곡하고 제가 어렌지 했을 뿐입니다.』

「작곡」이라는 말에 스트레스를 가하는 그의 긴장을 MC는 이해할만 했다.

『그러니까 굳이 비유한다면 Y씨는 대부 뻘이 되는군요.』

『글쎄요.』

아직도 나긋이 풀어지지 않은, 베토벤의 데드·마스크처럼 찌푸린 그의 얼굴에는 일순 고뇌의 빛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그러나 그는 남자다웠고, 그중 후한 몸가짐으로 스스로를 구제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앵글은 Y씨에게 향한 것이 아니었고, 대망의 메인·게임은 곧 이어서 공을 울렸기 때문이다.

『Y씨, 이 곡의 오리지널리티에 관해서 우리는 하나의 자료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연의 일치라기에는 너무나 쇼킹한 요소가 많은 이 자료를 이제는 증인으로 로서가 아니라 순수한 음악인으로 돌아가서 함께 검토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그의 가느다란 눈은 맥시멈으로 열렸다.

열린 눈앞에서 비로소 MC는 신문지로 감춘 디스크 한 장을 꺼내 들었다.

CALIPSO라는 노오란 표제에 바다 빛이 물들어진 때 묻은 쟈키트, 카메라는 이것을 줌·업했다.

『1963년 이태리 산·레모 가요제에서 7위에 입상했던〈검은 눈동자에 푸른 하늘〉,베티·꾸르티스가 부른 노래인데 우선〈사랑하는 마리아〉를 들은 다음 비교해 보기로 하죠.』

S·O·T(사운드·온·테이프)소리는 테이프로 튼다는 용어인데 문제의 노래가 테이프로 흘러나왔다.

『마리아 마리아 사랑하는 마리아…』

어떤 절실한 기구의 그것처럼 마리아를 연호하는 우리 가요가 페이드·아웃하자 빤제리와 빠아체의 작품인「Occhi Neri E Cielo Blu」의 맑고 밝고 아름다운 멜로디가 꼬리를 물고 나왔다.

피사의 사탑처럼 고개를 갸웃둥 듣고 있던 Y씨는 별로 감동하지 않는 것 같았다.

『좀 비슷하긴 하군요.』

『네, 그럼 이번에는〈검은 눈동자에 푸른 하늘〉에〈사랑하는 마리아〉의 가사를 대입해서 부른 노랩니다.』

오리지널에 우리 말 가사를 더빙한 2개 국어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그런데 그런데, 리듬이나 박자나 멜로디가 어쩌면 그렇게 신묘하게도 일치 할 수 있는가?

제 열쇠 제 열쇠 통에 들어맞듯 꼭꼭 들어맞았다.

텅 빈 오디토리움 안은 긴장감이 팽팽했다.

도대체 기술 스탭들은 웬만한 일에는 관심을 모으지 않는다.

프로그램의 성공도를 비추는 거울은 바로 그들의 얼굴이다.

그런데 카메라, 조명, 음향, 그리고 미술 스탭까지 숨을 죽이고 한곳에 눈을 모으고 있지 않은가?

이 집중, 이 놀라운 집중은 바로 공감의 언어라고 표현할 만한 것이다.

카메라는 이른바 리액션·커트로 경청하는 Y씨의 표정을 잡았다.

경악과 곤혹과 감탄이 버무려진 착잡함을 우리가 그의 얼굴에서 읽을 수 있었다면....

그는 발상이 같을 수도 있지 않느냐고 애써 비호하려고도 하지 않았고 또 틀림없다고 긍정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다만 스핑크스의 침묵 같은 것을 흘리며 입을 떼려 하지 않았다.

첫째 둘 다 포오크·캘립소라는 것, 둘째 화음진행과 멜로디가 같다는 것, 셋째 바리에이션이 AB AB로 비슷하다는 것, 모두 16소절 가운데 1/2에 가까운 소절이 같다는 등, 서투른 공통점 찾기는 싱거운 짓이었다.

우리는 당사자인 K씨의 외유중에 궐석재판을 연 느낌이었으므로 단정을 피하고 그의 명예가 훼손되지 않도록 다시 해명의 기회를 드리겠다는 것을 약속하고,〈사랑하는 마리아〉가 창작이든 아니든 1963년에 이태리에서 비슷한 노래가 불리어졌다는 사실만을 제시하고 결론을 맺지 않았다.

「선데이·매거진」이 끝나자 우리는 전화공세에 부닥쳤다.

비분강개도 있고, 찬탄도 있고 오랜만에 드릴을 느꼈다는 미스테리 광도 있었다.

다방에서 뜨거운 걸로 머리를 식히면서 Y씨와는 우정 같은 것을 맺었다.

무엇보다도 그의 신중에 매료됐기 때문이다.

그리고 MC는 음치반장의 불명예를 감수해야만 했다.

〈검은 눈동자에 푸른 하늘〉에〈사랑하는 마리아〉의 가사를 대입하는 비밀작업을 했던 토요일, 허스키·보이스의 여자 아나운서 셋이 차례로 테스트를 받았으나 한결같이 2/4박자에 넘어지고 말아, 이중 노출 같은 그 테이프에는 남자 목소리가 들어갔던 것이다.

예륜이 뒤늦게 이를 심의하고 일관성 없는 결정을 했다고 들었지만, 문제는 심의기관의 결정이 아니고, 그 노래를 애창하는 사람들의 마음의 델리커시에 있는 것이다.

마리아가 동정녀임을 믿는 우리는〈사랑하는 마리아〉도 처녀이며 한국인일 것을 믿고 또 바란다.

귀화한 마리아, 베일이 벗겨진 마리아를 뜨겁게 사랑할 수 없다는 강렬한 충동으로「선데이·매거진」은 진실을 추구했을 뿐이다.

지금도 이 노래를 들으면 의심암귀의 검은 구름이 마음속에 일며 우리들의 진실추구가 옳았는가를 반추하게 된다.

그런데 가사 전문을 새겨 보니〈사랑하는 마리아〉는 나를 버리고 가신 님, 나쁘게 말하면 출분한 여자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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