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운서, 최세훈/아버지의 수필 모음

사월의 사일간

최철미 2014. 2. 2. 11:39


사월의 사일간

3·15는 태풍번호였다. 독재자들이 그「눈」속에 도사리며 경보를 무시했을 뿐…. 특별, 차등, 공개, 간접의 원칙하에 투표가 끝나자『역사적인 정·부통령선거는 극히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무사히 끝났다』는 예정기사를 넘겨주며 기자도 픽 웃었다. 뉴스·캐스터들의 양심은 거부권을 발동해서 이 톱기사를 약속이나 한 듯 마구 지워갔다.

6시에는 「역사적」이 생략되고, 7시에는「극히」가 간과되고, 7시에는「자유분위기」가 무시되고, 1○시에는 모든 수식어가 추방되었다.

『정·부통령 선거는…끝났습니다.』

억눌린 개구기들의 자연 발생적인 반란은 이 간결한 요약으로 일단 종식되었으나 휴화산처럼 아주 식은 것은 아니었다.

「피의 화요일」…항쟁의 분화구가 열리던 날 방송국은 헬렌·켈러처럼 보지 않고 듣지 않고 말하지 않았다.

1시25분「오후의 음악」의 유려한 멜로디가 태평가 가락처럼 늘어지고 있을 때 비로소 나는 갱지 한 장에 휘갈겨 쓴 스폿트를 들고 스튜디오로 갔다.

『거리의 시민과 학생 여러분, 이성을 잃지 말고 곧 집으로 돌아갑시다.』이 환한 대낮에 무슨 GHQ 운동의 표어란 말인가.

곡목 소개를 하던 서선벽 아나운서에게 나는 유리동물원에 유폐된 관영방송 아나운서의 신세를 푸념했다. 2시의「관현악」부터 정규방송은 무너지고 5분마다 스폿트가 반복되었다.

계엄령이 선포되기 전, 유탄 한 알이 창문을 부쉈다. 내려진 샤터 틈으로 한떼의 고등학교 데모대사가 남산으로 오르는 것이 보였다.

관제 신문 사옥으로 오르는 불기둥이 남의 일 같지만 않았던 간부와, 총알이 날아 올까봐 사무실을 기어 다니던 사람들은 일제히 뒷담으로 몰렸다. 넘어가면 남산의 골짜구니…월장 제1호는 높은 사람, 제2호는 만삭의 여자 아나운서라던가.

군인들의「피켓트·라인」밖에서 서성대며, 나와서 데모 중계방송을 하라는 싱거운 소리를 지껄이다가 데모대는 병아리 떼처럼 흩어져 갔다.

방송국을 향해 치닫던 노도와 같은 대학생 대열이 치안국 선에서 저지되지 않았던들 방송사는 다시 쓰여 져야 했을 것이다.

경비계엄이 비상계엄으로 바뀌고 거슬러 올라가고 하는「지그자그」속에 사자들의 외침과 포수들의 총소리가 확연히 들리던 그때의 남산은 사실보도의 기능을 잃고 공전하고 있었다.

『이성을 잃은 학생과 시민들의 난동』이라는 논조가 뒷걸음질 치고, 6·25를 상기시켜 민심을 귀일하려는 격문이 염불처럼 의무적으로 반복되었다.

『우리는 다 같이 6·25 남침의 민족적인 비극을 겪어 온 동포들입니다. 우리들의 마음은 한결 같습니다. 우리의 지나친 행동으로 사회질서가 어지러워지고 국가와 동족의 재산이 부셔진다면 그 얼마나 슬픈 일입니까?…』

「우리」라는 이 대명사로 동류의식에 호소하려는 이 도덕 강의를 청중들은 보이콧트했다. 해가 기울자 방송국은 사태를 장악한 계엄사령부의 원격 조작 밑에 들어갔다. 밖은 총성이 멎지 않았는데 질서가 회복되었다는 가짜 진정제를 거듭 거듭 복용시키라는 엄명이었다.

취재는 아나운서실의 원탁 위에서 이루어졌다. 이성을 잃지 않으려는 책임자의 구술을 기자들이 딕테일하고 아나운서들은 윤번제로 방송실을 드나들었다. 방송의 모든 타부는 깨뜨려졌다. 문을 여닫는 소리, 의자 삐걱이는 소리, 기침소리, 종이 부스럭거리는 소리… 이 자연스런 음향효과를 깔며 누군가가 마이크 절반은 의식하면서 짜증 섞인 독백을 내뱉었다.『이걸 또 되풀이 해?』그 잡음이 on AIR된 것은 물론이다.

무색투명한 음악을 흘리면서 이 원탁기사를 삽입하는 것이 효과적인 전달방식이라는 건의는 묵살되었다. 음악도 생략해버린 그 지루한 스트레이트·토킹을 누가 들었을까?

양이 질을 압도하리라는 오산과 마인·캄프식 반복 때문에 다이얼은 민간국으로 돌아가고 라디오를 아예 깨뜨려 버린 열혈한도 있었다.

낮2시부터 밤11시까지 9시간동안 이「긴 염불」은 납세자의 분노를 샀지만 세금 악용의 일정은 계속되었다.

날이 밝자 계엄사령부의 스피커가 되어버린 방송국은『미 육군 장교 브로커씨는 이승만 대통령의 4선을 축하하는 전문을 보내왔습니다』라는 뉴스를 내며 엉거주춤했다. 진실을 엄폐하는 이 반혁명적인 자세는 규탄의 대상이 되었고 아나운서가 그 표적이었다.

항의 전화가 빗발치고 협박장이 퀴즈 응모 카드처럼 답지했다.

"우리들이 민주주의를 되찾으려 길가에서 피를 뿌릴 때 너희들은 난동자라고 불렀다. 영령들이 너희들을 사하리라고 믿는가'" 마 바이올렛 빛으로 변색한 혈서 한 장도 그 가운데 끼어 있었다.

영령들의 용서를 받는 길은 없었다. 진심으로 명복을 비는 것 밖에는….

이기붕씨가 부통령직의 사퇴를「고려」한 날 4·19희생자 합동위령제의 중계방송 예정표가 흑판에 게시되었으나 아나운서들은 흑판 앞을 비실비실 피하며 못 본 체했다. 사태는 아직도 유동적이었던 것이다.

방송 계장 강익수씨는 신중한「고려」끝에 나를 「산길」다방으로 불러냈다.

『미스터·최』텃 자에 독특한 액센트를 붙이는 그의 양 같은 눈망울이 스르르 아래로 깔리면서 그 중계방송을 왜 나에게 맡기는가를 설명했다.

미사려구라는 느낌이 짙었지만 명령에 대한 항거는 아나운서 세계의 금기인 것이다.

민심을 자극하지 말고 또 민심을 이반하지도 말라는 사전 지시는 마치 두 가지 약을 현합하는 유당 같은 것을 처방하라는 것과 다름없었다.

애통하는 국민과 아직도 권력에의 집착을 깨끗이 체념하지 못한 소수 자유당을 동시에 수긍시킬 어휘는 사전에 없었다. 그리고 나에게는 줄타기의 곡예 같은 기술이 없었다.

예정 원고를 작성하는데 용기를 준 것은「A·E·하우스 맨」의 시였다.

여기 죽어서 우린 누워 있노라.
살아서 우리가 태어난 땅을 욕되게 할 것을 택하지 않은 까닭에.....
분명코 생명보다 더 값진 것은 없다.
그러나 때로 젊은이들은 뭣인가 있다고 생각한다.


 Here dead we lie
 Because we did not choose
 To live and shame the land
 From which we sprung.
 Life, to be sure,
 Is nothing much to lose,
 But young men think it is,
 And we were young.
-- A E Housman




그렇다 나는 순수히 통곡하리라.

HLKA 의 논조를 다시 확인하려고 돌다리 두드리듯 상사의 방을 노크했다.

"이 사태를 '의거'로 표현해도 좋을까요?  그렇지 않으면......"  편성계의 박종민씨가 민첩하게 개입했다. 

"의거지요!  4.19는 의거입니다."

상사는 신음하듯 동의했다.

"아암, 의거지......"


남산에는 중계방송 여부를 문의하는 전화가 잇달았다. 보조 아나운서 김주환씨와 함께 용산 육군구장에 들어서자 워키·토키를 멘 헌병을 전초로 유니폼의 철조망이 둘러 있었다. 태양도 슬펐는지 낯을 가리고 빗방울이 떨어졌다. 영웅들의 못다뿌린 눈물이었는가? 4월22일 현재 영령은 109주.  먹물도 채 마르지 않은 위패는 폭풍에 찢기운「쓰레기통의 장미」의 잔해처럼 널려 있는데 살아남은 학생들은 발을 구르며  무엇인가를 큰 소리로 토론하고 있었다. 관제는 모독이니 퇴장하자는 주장과 이를 만류하는 설득이 서걱이고 있었던 것이다. 이윽고 정장을 갖춘 계엄사령관이 위풍 당당히 입장했다. 사태 수습에 있어 국민의 신망을 모은 이 삼성의 둘레를 조객들은 위성처럼 둘러쌌다. 향불은 말없이 타오르고 있었다.

젊은 넋들이 고요히 승화하는 것이다. 저 향불의 의미를 아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6분전─』

스탠·바이의 지시에 따라 중계석에 앉은 나의 시야에 국회의장 이기붕의 조화가 들어왔다. 연락용 전화가 따르르 울렸다.

『여보세요 현장?…현장이요? 국무회의에서 부결됐으니 중계반은 철수 하세요』땅바닥에 펄썩 주저앉아 버리고 싶었다. 그곳이 바다라면 침몰할 것 같은 좌초감, 마지막 한 잎 같은 국무회의는 겨우 방송국장 전결사항인 중계방송 여부를 조상에 놓고 바르르 떨었던 것이다.

슬퍼하는 자유도 봉쇄해버린 자유당은 이틀 후에 운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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