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운서, 최세훈/아버지의 수필 모음

그때나 지금이나

최철미 2014. 2. 2. 11:59

그때나 지금이나


회색의 브라운관에 따뜻한 피를 통하게 하던 외화「페리·메이슨」을 지금은 방영하지 않는다.

그러나 밤을 지키는 올빼미같이, 원죄를 투시하며, 치뜬 메이슨 변호사의 눈동자는 강렬한 영상으로 지워지지 않는다.

텔레비전의 오스카 - 에미상을 두 번이나 받은 이 드라마· 씨리이즈는 냉엄한 법과 대결한 휴매니티의 승리를 묘사하고 있다.

경찰이 제시한 증거와 검찰의 정연한 논고는 대단원까지 억울한 쇠사슬로 피의자를 얽어맨다.

그러나 바늘 구멍만한 허점으로부터 무죄를 연역해나가는 최후의 변론으로 마침내 통쾌한 반전… 검사의 표정이 희화되면서 엔드·마아크가 찍힌다.

벼랑에선 인권에 따뜻한 손을 내밀어 끌어올리는 정의『페리·메이슨』 그 주역 레이몬드·바아가 어느 추운 겨울 한국에 왔다.

코리어에 내린 이 배우의 헤드·라이트처럼 큰 눈망울에 아프게 들어온 것은 황량한 네거리에 동계제복만으로 떨고 서있는 교통순경이었다.

한 씨즌의 계약금을 몽땅 희사해서 그는 털외투를 선물했고, 이 카나다인의 TV속의 변호료로 코리어의 공복들은 몸을 따뜻이 감쌀 수 있었다.

브라운관 속에서 경찰과 맞서던『페리·메이슨』의 주역이 추위에 떠는 교통순경에 연민을 느꼈을 때, 자선을 베풀었을 때, 그리고 어쩌면 그 인기전술에 스스로 만족하고 있을 때, 그때 당신은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법원으로 들어가는 바쁜 골목어귀에서 위반자 단속하는 경관에게 오히려 호통치는 영감들이, 질풍처럼 달리는 특권차량들이 그때나 지금이나 없는가?


<1967년 9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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