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운서, 최세훈/아버지의 수필 모음

기념식의 징크스

최철미 2014. 2. 8. 09:45

기념식의 징크스

리승만 박사와 리기붕 선생이「락성식」에 납신 그날의 남산 연주소는 안팎으로 한랭전선이 머물었다.

분수터에 빙화가 피어난 영하의 날씨, 경호원이 쳐놓은 싸늘한 피켓트 라인……추위와 긴장에 저항하듯 실내의 스팀은 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가위질을 끝낸 VIP들이 칠냄새 물씬한 오디토리움에 영접되고 있을 때 방송과장의 앙분은 사뭇 히포콘테리에 가까웠다.

「귀빈들이 오시는데 넥타이도 매지 않고 왜들 기웃거리는 거야!」

간이복 차림의 몇 사람 때문에 일종의 연대 기합, 앵무새들은 발이 묶이고 정장을 갖춘 장기범 아나운서만이 금족령 밖으로 나아가 사회석에 섰다.

천상의 음악인듯한 하프와 풀룻이 역사의 풀레류드를 울렸다.

특별연자 아더 로라, 에드워드 비토씨를 초청한 경축음악회를 이층 로열·박스의 노인들은 감동 없는 얼굴로 굽어보고 있었다.

단하의 비좁은 통로에서 스팀에 기댄 채 공수시립한 MC의 옷은 안팎으로 젖어 왔다.

스팀의 연관에 틈이 벌어져 뜨거운 수증기가 분사된 것이다. 화부처럼 땀을 흘리는 그의 본견직 넥타이도 마침내 후즐그레 풀끼가 빠졌다.

의례적인 박수가 몇 차례 거듭되고 혼신의 기력으로 끝까지 버틴 사령자는 뉴우톤의 시계처럼 폭 삶아졌다.

복장 때문에 20미터 상거의 역사에서 소외된 아나운서들이, 돌아온 용사를 반기자 넥타이를 풀어헤치던 장기범씨는 자조하며 웃었다.

「나아 참, 개시부터 무료로 터키쉬 배스야……」

그 증기욕으로부터 일 년 전, 넥타이기피증의 아나운서 하나가 새로 산 웸블제이표 목댕기를 하고 또 단하에 섰다.

개소 일주년특집 방송 대음악회, 이름은 호화로웠으나「수요일밤의 향연」이라는 정규 레파토리로 격이 떨어져 있었다.

VIP들도 눈에 띄지 않았고, 목을 너무 졸라매어 순환장애가 일어났는지 머리가 아찔해 왔다. 교향악단은 쏘나타를 연주했다.

감미롭고 나른하고 어쩌면 권태로운 테마가 제시되고 전개되고 재현되는 그 주명곡 속에서 아나운서의 영혼은 육체를 떠나 방황하고 있었다.

연주가 딱 멎었다. 퍼뜩 깬 아나운서는 기계적으로 손뼉을 치며 박수를 유도했다. 그러나 아무도 따라서 박수하지 않았고 콘덕터 임원식씨는 빙그레 웃으며 지휘봉을 움직였다.

제2악장 아다지오가 끝났을 뿐, 쏘나타는 아직도 종결부가 남아있었던 것이다.

역류하던 피가 갈아 앉자, 오히려 창백해진 아나운서는 개소식 때부터 무슨 요귀할멈이 찾아오는가 하며 오디토리움 안을 두리번거렸다.

군사혁명의 해에 다시 기념식의 MC로 지명된 아나운서는 지상의 별들에 눈이 부셨다.

서부독일 뷴가대사의 악보 기증식을 곁들인 그 패스티벌은 참으로 호화로웠고 서사로부터 프로그람 전부를 암송해버린 아나운서의 언휘는 녹음테이프처럼 매끄럽게 풀려 나왔다.

하이든의「천지창조」로 부터「가야고와 관현악」까지의 레퍼토리에 그 전통적인 징크스는 틈입하지 않았다.

가야금의 유현한 율조가 거의 끝나, 승리를 자축하며 가슴을 내리쓸을 때 VOA에서 돌아온 장기범과장─개시부터 토이기욕을 한 1번 타자는 2층 귀빈석에서 한 장의 메시지를 급히 전했다.

「우리말로 먼저 하고 다음에 We prepared some beverage for all of you at sky lounge, We would much appreciate If you join us at this party.」 이 짤막한 긴급명령은 단테의 신곡보다 더 길어 보였다.

외교사절과 동령부인이 기라성처럼 열석한 자리에서 영어로! 어떻게? 더구나 종곡은 다 끝나고 있었다.

오오 하느님 나를 도우소서.
우리말이야 어떻게 대의만 풀이했지만 영어는…영어는…그러나 박수가 아나운서를 평가했다. 그리고 주기도문처럼 외워버린 그 제1외국어를 알아듣고 이방인들은 빠짐없이 칵테일 파티에 모였다.
남산을 떠나 셋방살이 상업자에 유전한지 3년,  신국사의 개소식이 멀지 않았다니 징크스 퇴치법도 연구해 두어야지.

(19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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