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운서, 최세훈/아버지의 수필 모음

사자후

최철미 2014. 2. 8. 09:53

사자후

「브라운」관의 마법에 눌려 안방을 쫓겨난 「라디오」는『여러분』이라는 청취대상을『당신』이라는 단수로 바꿔「맨·투·맨」전법을 쓰고 있다.
더욱이「트랜지스터」라는 수신기의 혁명으로 대사도 없이 음향만을 진동으로 느끼는 가슴에 대고 듣는 「드라마」도 출현했단다.
「걸리버」의 소인국 기계처럼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이「트랜지스터·라디오」 는「스포츠·캐스터」의 거짓말을 적발하는데 작은 고추처럼 맵다.
눈으로 경기를 보고 귀로 해설을 듣고 입으로 관전평을 하는 관중들에게 그 입체전의 무기인 휴대용 수신기가 없다면「아나운서」의「픽션」은 얼마나 자유자재로울까?
그리고 이제는 경기 동작을 시녀처럼 충실히 따라다니는 기관총속사식의「스타일」도 버릴 때가 왔다.
묘사의주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전달하는 계몽시대는 이미 지났고, 어떻게 하고 있는가, 무엇이 그 특징인가를 발견해서 공감시키는 차원에 이르지 않았는가.
동작의 기본은 비슷하고「룰」은 알려져 있고 또「아나운서」의 입이 경기를 추종하기에는 그 속도가 너무 낮다.
『냇물처럼 잔잔하다가「게임」이「익사이팅」해지면 파도처럼 일고 일었다간 다시 잔잔해 지는 유려한 기조위에서 담담히 보이는 대로 바르게 그리는 말의 화가여야 한다』는 ABC도 간과되는 느낌이 짙다.
흥분에서 격양으로, 격양에서 사자후로 이행하는 우리들의「캐스터」… 유연체조처럼「리드미컬」해야 할 그들의 목소리는 왜 그리 역도처럼 무겁고 힘이 드는 것일까?
TV중계쯤 되면 시청자를 당달봉사로 여기는 경우가 많다.
프레임 안에 들어오는 경기진행상황을 일일이 설명하는 과잉친절과, 동작 하나하나를 뒤쫓는 그 췌언….
눈이 흐린 사람들을 위해서만 비데오의 설명은 필요할 것이다.
「장님을 위한 예술」에의 미련을 못해서인가?
수신기의 혁명처럼 사자후의 중계방식에도 혁신이 와야 할 것이다.


                                                                                                                       (1966년 서울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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