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운서, 최세훈/아버지의 수필 모음

ABC… 편지를 띄우기도 하고

최철미 2014. 2. 8. 10:28

ABC… 편지를 띄우기도 하고

처음으로 공개방송의 사회를 맡고 등단하면 흔히들 관중석이 눈에 띠지 않는다.

안개가 자욱이 낀 듯, 도시 전면은 여리 어리 한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은 고사하고, 관중에게서 압박감을 느끼는 고역을 겪는다.

나처럼 전면공포증이 심한 경우에는 그 정도의 차이가 있는지도 모른다.

하여튼 날이 가고 달이 바뀌는 동안 안개가 걷히고 관중의 얼굴이 시야에 선명히 다가온다. 그리고 나면 사회자는 손 처리에 고심하게 되고 급기야는─「쇼맨쉽」을 염두에 두기 시작한다.

 ─「쇼맨쉽」을 체득한다는 것은 용이한 일이 아니다. 관중을 순간순간 이끌 수 있는 통솔력을 갖추어야 한다. 또 고답적이거나 지나치게 아카데믹하거나 또 저속한 신파조가 되어서는 안 되는, 즉 그 평균치, 그 중용을 택해야 한다. 그뿐 아니다. 관중들의 요구를 즉각 간파하여 그 최대공약수를 찾아내야 한다.

관념적인 얘기가 되고 말았다. 어쨌든 일정한 수준에 이른 아나도 내향적인 경우에는 그 자리에서 답보한다는 말이 있듯이, 아나 로서「쇼맨쉽」을 갖추기란 오랜 수련과 재질을 지녀야 한다. 말의 풍부한 창고이어야 하고 올바른 언어를 구사해야 하는 등의 허다한 조건이 구비 되어야 한다. 물론 우리나라의 현실로서는 그 조건에 접근하려는 의욕에서 그치고 마는 감이 없지 않지만.

각설인지는 몰라도 사족은 아닌 것 같아서 한마디. 이것이 나의 심중 한 구석을 차지한 밀담이기도 하니 말이다.

이런 의욕과 불만 속에서 마이크와 더불어 살아오기 벌써 여섯 해를 헤아리게 되었다. 그동안 적잖은 소화와 에피소드가 없을 수 없다. 헌데 다시 생각해보면 유별난게 없는 것 같다. 단조로운 생활처럼 평범한 얘기인 듯싶다.

그 하나.

공개방송 「노래고개」에서의 일이다. 진주에서 일부러 상경했다는 중년부인이 등장했다. 아나의 얼굴도 보러 왔노라는 죠크를 잊지 않는 네 딸의 어머니였다.

드디어 여나문살 댕기머리 시절에 배웠다는 「학도가」(?)를 멋지게 부르고 난 그 아주머니는 15살에 결혼했다고 했다. 적잖이 흥미를 느끼고 그 첫날밤에 제일 처음 무슨 말을 했느냐고 넌지시 물어 보았다.

『첫날밤 말인교? 말 마시이소. 그 양반이 글쎄 당신 이름이 먼교? 하고 묻는데 예, 내사 한갑순이라 안했읍니꺼…』

순간 장내에는 폭소가 터졌다. 신기하다는 듯이 박수갈채를 보내는 젊은이도 있었다. 하기야 요즈음 젊은이들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옛말 같은 일이니 말이다.

그리고 그 둘.

이것은 한 청취자 때문에 벌어진 삽화다. 소위 팬·레터라는 것이 내 앞으로 왔다. 물론 그런 류의 편지를 처음 받아본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 것은 조금 색다른 것이었다. 한국 사람에게 보내온 영문편지였다. 나를 만나 뵙고 싶다는 내용이었는데, 미사려구와 정중함이 듬뿍 담겨져 있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나는 짓꿎은 호기심과 젠체에 대학 해학을 느꼈다. 곧 답장을 썼다. 아니, 타자기의 힘을 빌렸다.

abcdefghijKlmnOpqrstuvwxyz

그뿐이었다. 내가 회신한 내용의 전부였다. K와O를 대문자로 한 것은「O·K」를 암시하는 것이었다. 즉 만나자는데 「동의」혹은 「승인」한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나의 편지를 받아본 이로서는「O·K」의 순서가 바뀌었으니「K·O」로 생각하고 「넘어뜨리다(Knock out)」를 연상하면서 망설였으리라는 것은 짐작할 수 있었다.

결국 나는 그를 만나기로 했다. 하늘은 높푸르고 산들바람이 가볍게 스치는 어느 날 오후였다. 고궁의 그윽함을 찾아 덕수궁 연못가를 택했던 것이다. 그는 모 여대 불문과에 재학 중인 학생 이였다.

그뿐이다. 더도 덜도 없다. 숨은 얘기가 이 정도라니 나도 모를 일이다.


'아나운서, 최세훈 > 아버지의 수필 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장님을 위한 예술   (0) 2014.02.08
행복의 문지기  (0) 2014.02.08
야생의 꽃을 울안에 심고  (0) 2014.02.08
아나, 아나운서  (0) 2014.02.08
여성의 매력  (0) 2014.02.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