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운서, 최세훈/아버지의 수필 모음

바람보다 햇빛

최철미 2014. 2. 8. 11:25

바람보다 햇빛

양심은 밀폐하기 어렵다. 살기 위해 때때로 차폐할 뿐....

고지자에 지나지 않는 아나운서가 개구기로 비판되던 어두운 계절이 있었다. 정말이었다고 해도 성능은 그리 좋지 않았다. 60년3월15일 『역사적인 3·15정부통령선거는 극히 자유로운 속에서 무사히 끝났습니다....』라는 뉴스원고를 아나운서들은 지우개 없이 방송할 수 없었다.

6시에는 『역사적』이 생략되고 7시에는『극히』가 간과되고 9시에는 『자유로운 분위기』가 무시되고 10시에는 모든 수식어가 추방되었다. 아무런 정치의식도 없었다. 다만 의식보다 앞서는 양심이 명령한 조그만 레지스땅스였지만 차폐된 양심이 조금은 답답하지 않았다.

차폐물은 또 있었다. 4월 19일. 밖은 아직도 총성인데 상부에서는『질서가 회복되었다』는 가짜 진정제를 처방해서 거듭 거듭 복용시키라는 것 이였다.

히틀러는 그의 『마인·캄프』에서 거짓말도 자꾸 반복하면 믿는다고 했던가?

모든 타부는 깨뜨려졌다. 방송실의 문을 여는 소리 의자에 앉는 소리 종이 부스럭거리는 소리 기침소리 이 자연스런 음향효과 속에서 어느 아나운서는 마이크를 절반은 의식하면서 짜증 섞인 목소리를 내뱉었다. 『이걸 또 되풀이 해?』밀폐되지 않는 양심의 이 가녀린 발음은 자랑이 되지 않는다.

이러한 일화의 주변에서 하나의 우화의 의미를 체득하면 그뿐.

겨울 나그네의 외투를 벗긴 것은 바람이 아니라 햇빛이었다는,,,.


                                                                                                         (전북일보 1963년 8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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