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운서, 최세훈/아버지의 수필 모음

해변의 꿈

최철미 2014. 2. 8. 11:35


해변의 꿈

인공제빙이 가능하지 못했던 1800년대에 나폴레옹은 마라톤선수를 시켜 알프스 산의 눈을 움켜다 먹었다.
오늘날의 아이스크림은 거기서 유래한다는 이설이 있거니와 그 때 그 땅에서 태어났다고 한들 나는 헐떡거리며 산정을 기어오르는 주자가 아니면 그의 건각에 의존해서 목숨을 잇는 어설픈 가족과 같은 계층일 수밖에 없었을 테니까 피서란 아직껏 해 보지 못한 사치이다.
그래서 차라리 여름이 좋다.
르네·끄레루인가 하는 감독이 만든 영화에『태양은 빈민과 부랑자의 것』이라는 대사가 있었는데 부랑은 하고 있지 않지만, 태양은 내 것이다.
발돋움하지 않아도 가장 가까이서 볼 수 있는 태양과 모든 것을 원색으로 칠하는 그 직사광선─.
여름은 참으로 좋다.
빛의 삼원색과 빛깔의 삼원색이야 어떻게 다르건 산과 들, 바다와 거리는 그대로 원색의 아라베스크, 거기에 인간들은 벗을 수 있는 한 벗어 노출본능을 만족시킨다.
여름은 원시로 회귀하는 계절인가?
알몸을 풀숲에 비비던 시원의 광야는 상하였을 것이다.
이렇게 농도 짙은 색조를 바라보며 욕망으로부터 도망치려는 계의 속 수녀의 흐르는 땀을 생각하며, 땅 속 수분을 빨아들여 여러 가지로 형우리 잡힌 과일들의 의미를 되씹으면 나의 여름은 다 가고 만다.
그런데 여름을 귀로 느낀다는, 정확히 말하자면 느끼자는 여인이 있었다.
어쩌면 그것은 고등감각일 테니까 귀족이라고 상상해도 좋다.
해조음이 들리는 곳에 별장을 짓겠다고 봄부터 여인은 서둘러댔다.
보름이면 달이 세 개 뜨는 곳이라니까, 그 지점을 아는 사람은 안다.
바다에 하나,
호수에 하나,
하늘에 하나,
거기서 나는 네 개째의 달을 볼 셈이었다.
술잔위에 뜨는….
얼큰해지면 나는「달처럼 아름다운 미인」「미인처럼 아름다운 달」이라는 동서양의 미의식의 차이를 얘기하며 여인을 달에 견주었을 거고 여인은 나의 언어를 음악으로 여겼을는지도 모른다.
달이 없으면 우리는 사장으로 걸어 나가, 나는 모닥불을 피워 불꽃을 보고 여인은 눈을 감고 빠지직 타들어가는 연소음을 감상했을는지도 모른다.
불이 꺼지면 나는 득의의 하모니카를 꺼내어「알로하오에」같은 곡을 불어제쳤을 것이다.
여름밤에 퍼져 나가는 이 리이드 악기의 신비로운 음색에 여인은 얼마나 몸을 떨었을까?
그렇게 꼭 그렇게만 시간은 흘렀을 것이다.
낮에는 함목크에 흔들려 자고 밤에만 살자고 했으니까….
그런데 그런데 정사의 종말은 너무 일렀다.
그것을 애종이라고 하던가.
황제를 위해 눈을 움켜쥐고 씨근벌떡 달리는 마라돈 선수일 수밖에 없는 나는 여름을 다시 조용히 지켜보며 살아 갈 것이다.


                                                                                                                   (1962년 대한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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