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운서, 최세훈/아버지의 수필 모음

MC를 위한 현학적 노트

최철미 2014. 2. 8. 11:32


MC를 위한 현학적 노트


A.  피아노 앞에 앉아 본다.
검은 짐승의 흑백의 이빨 같은 키.
그 저음부에서 고음부까지 2미터 남짓의 거리가 수천의 곡을 요약하고 있다는 것은 얼마나 신비로운가?
알파벳과 문학, 3원색과 회화의 관계도 그렇다.
그렇다면 명곡과 명작과 명화의 비밀은 기본단위의 조합의 기술에 있지 않았던가?
그리고 많은 사람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킨 것이 반드시 오래 남는 것은 아니지만 오래 남는 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준다.
그러므로 듣는 사람들이 무엇을 원하는가 하는 공약수를 파악하고 거기 자기 기능의 공배수를 플러스한다는 것이 MC라는 인종의 기본자세가 아닐까…….
그리고 알파벳으로부터 수만휘에 이르는 말의 바다에서 소금을 말리는 것과 같은 작업으로 얻은 언어를 무기로 삼고….


B.  레드·스켈톤의 S자만 보아도 미국사람들은 웃는다고 한다. 그것은 이 희극배우의 무형의 신용장과 같은 것. 말하자면 레드·스켈톤이 갖는 분위기인데, 이 분위기가 몸에 밴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하다.
회중의 수용태세는 비유하자면 빈 독과 같다.
즐거워하고 싶고 감명을 얻으려 하고 방향을 제시받고자 한다. 즉 무엇인가를 받아서 채우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줄 수 있다는 보증을 해야 한다.
받을 수 있다는 신뢰감을 느끼게 해야 한다.
이것이 분위기이다.
회중은 원, MC는 구심점.
무대 위에 서면 우선 엘머·휠러를 기억해야 한다.
최초의 10초.
말문은 간결하고 직접적으로 다이나믹하게 열어야 한다.
머리가 몹시 벗어진 신사가 연단 위에 올랐다.
회중은 웃음을 깨물었다. 깨무는 소리가 아주 안 들리는 것도 아니었다.
신사는 말문을 열었다.
『저는 대머리입니다.』
회중은 가가대소 마치 화약에 불을 지른 것처럼….
신사는 연설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최초의 10초에 회중의 마음을 손에 쥐었으므로….
MC도 마찬가지, 가려운 데를 우선 긁어 줘야 한다.
긁었으면 곧 연출 플랜대로 실행한다. 출연자이며 연출자라는 이중의식에 투철할 것, 이것이 없으면 성공하기 어렵다.
발단과 전개와 고조와 대단원이 어디쯤인가 하는 계산표가 과학적으로 치밀하게 짜져 있어야 한다.
그것을 명쾌, 스피디, 친절, 위트라는 기조위에서 요리해야 할 것은 물론이다.
온 에어가 되면 누구나 하는 프롤로그, 여기서는 이제 천편일률을 추방해야 할 것이다.
아무리 예의지국이지만 MC가 하려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고 반추를 싫어한다.
한 개의 사과를 한 방울의 과즙으로 압축한 것과 같은, 다시 말하면 몇 개의 어구에 프로그램의 내용을 집약한 짧고 요령을 얻은 프롤로그, 프롤로그는 엣센스이어야 할 것이다.
어조는 화려하고 색채감이 있도록….
프롤로그와 동시에 또는 그 뒤에 미사여구가 즐겨 쓰인다.
그러나 회중은 수사학을 좋아할까?
그들은 재미를 갈구하고 있을 뿐이다.
나중에도 그렇지만 처음부터 흥미에 호소해야 한다.
『소설은 재미 위주여야 한다.』는 써머셋·모옴은 위대한 상식인이다.
MC도 그래야 한다.
그러나 에로 페이퍼의 논조 같은 것으로 영합하려 들면 타락을 면치 못한다. 영합하지도 않고 고고하지도 않은 평균치를 몸에 붙인다는 것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쇼맨십이 아닐까?
어쨌든 재미는 어디서 올까?
어떠한 형태의 프로그램이건 그 노른자위는 화술이다.
그런데 그것은 천부의 자질에서만 가능한 것일까?
녹음 한 달 전에 출연자에 관한 데이터를 수집하고 앙케이트를 만들고 그 질문에 어떠한 대답을 해 올 것인가를 예견하고 그 다음의 응수를 준비해 둔다는 외국 MC의 조직적인 방법은 분명히 후천적인 노력이다.
거기에 박진성이 보태진다면 천부의 자질과 버금할 것이다.
이야기를 거는 기술에 관한 에릭슨의 소견을 옮겨 보자.
A…Arrange the office.
B…Be friendly
C…Cast aside unfinishment.
X…Expect to meet many program.
Y…Yield to the specialist.
Z…Zealously protect the counselly.
이 ABC와 XYZ를 요약할 수 있는 말은 무엇일까?
사랑.
그렇다. 사랑이 가장 근사치일 수 있다.
사람을 사랑하고, 진정한 관심을 가질 때, MC는 구태여 이야기를 거는 데 기교를 염두에 두지 않아도 될 것이다.
회중은 위정을 간파하는 데 가장 예민하기 때문에….
『마음속에 느끼고 스스로 마음으로부터 우러나는 저력 있는 흥미로써 모든 회중의 마음을 끄는 것이 아니면 안 된다.
머리와 성실한 마음만 있으면 재주를 피우지 않아도 말은 저절로 할 수 있다.』─「파우스트」의 2막 밤의 장면에서─
그리고 언어는 생활화해야 한다.
일상의 회화에서도 말을 선택하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모래알 가운데서 금을 찾아내는 선광의 과정과 같이 가장 적절한 최선의 말을 골라야 한다.
김소월의 끝끝내 하지 못한 최후의 한 마디 같은 절구….
영국의 의원이 장관을 불러 놓고,
『당신은 수의사 출신이라지요.』라고 야유한 말에서 우리는 여러 가지 응수를 예상할 수 있다.
『뭐요?』
『그래서 어쨌다는 거요?』
이런 흥분과 격앙이 아니면,
『그것도 의사진행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라는 타이름.
『네, 그렇습니다. 어디가 편찮으신가요?』
이런 즉묘 즉답을 할 능력이 MC에게 요구된다.
그 이상일 수도 없고 그 이하일 수도 없는 절대적인 한 마디가 MC의 주 무기이다.
그리고 라디오가「장님을 위한 예술」인 한, 뛰어난 묘사력이 요구된다. 한 마디로써, 표현하려고 하는 주체의 이미지가 떠오를….
그리고 그것은 궁정요리의 메뉴처럼 늘 변화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페이스의 변화, 무드의 양성은 앞서 말한 연출자라는 의식의 강도여하가 좌우한다.
프로그램 전체를 MC의 두뇌 하나로 어렌지 한다는 것, 어렌지먼트란 생경한 것을 연화하는 기술이라고 정의한다면 MC는 그 연화제의 처방의 능수이어야 한다.
그래서 프로그램의 전체적인 통일을 기해 회중과의 괴리를 막을 수 있는 것이다.
끝으로 다시 한 번 엘머·휠러를 기억해야 한다.
『회중에게 줄 디저트를 잊지 말라.』
영화의 라스트 시인처럼 회중은 MC의 마지막 처리, 에필로그를 되씹으며 헤어질 것이다.


C.  선배, 에드·헐리의 수기를 기억한다.
『나는 일정한 수준에 이르렀어도 그 이상 발전하지 못한 많은 내면성의 MC를 알고 있다.』
그들은 최대의 공약수를 파악하면서도 자기의 공배수를 보태지 못했거나, 최소의 공배수를 가지고서도 최대의 공약수를 몰랐던 것이다.
또 한 가지 바이블의 구절을 생각한다.
알고 지은 죄는 모르고 지은 죄보다 무겁다는…
그렇다.
나는 죄인, 거짓 선지자. 


(1963년 방송문화)





(아버지의 또 다른 명언 - 사람을 사랑하고 진정한 관심을 가질 것 - 사랑이 부족한 내게 아버지는 말씀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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