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운서, 최세훈/아버지를 추억하는 회고담 모음

상과 하

최철미 2014. 2. 8. 12:02


상과 하

아버지의 스크랩북에 있던 장기범 아나운서의 수필


위인 일화선에서 읽은 얘기이다.
덕망이 높은 군자에게 어떤 사람이 그 덕망의 근원이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군자는 미소하며 그것은 모든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성품과 능력이 다종다양하고 천차만별인 여러 사람을 동등하게 또 공평하게 대우한다는 것은 참으로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이 군자의 경우, 어떠한 것도 수용 할 수 있는 넓고 큰마음의 용량을 가졌다는 것이다.
그것은 덕이었다.
덕을 기르기 위해서는 남의 작은 허물을 책하지 않고 남의 사사로운 일을 폭로하지 않고 남의 오랜 흠집을 생각지 않는 세 가지로 해야 한다는 채근담은 참으로 적절한 교훈이다.
이 교훈에서「남」이라는 말에 「부하」를 대입해서 그것의 실천에 투철 한다면 훌륭한 상관이 될 것이다.
지장은 불여덕장이라는 말은 고금을 통하는 진리이다.
남을 통솔하는 최선의 방법이 덕에 있음을 알면서도 덕성의 함양에 마음을 기울이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덕을 크게 하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을 한다는 의무를 높게 생각하며 그럼으로써 생기는 보답에 대해서는 일절 생각하지 않는 정신의 높은 경지에 이르기가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덕성은 만사에 공통되는 행복의 근원이다.
이 최초의 것을 완성하기 위한 끊임없는 추구의 과정 위에 모든 사람이 설 때, 세상은 더욱 밝아지고 우리는 최강의 군대를 가질 것이다.
독일에는 다음과 같은 격언이 있다.
「한 아버지는 열 아들을 기를 수 있으나 열 아들은 한 아버지를 봉양하기 어렵다.」
다시 한 번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말에 다른 것을 대입할 필요도 없이 상관을 모시는 사람들이 명기해 둘만한 것이 아닐까?
성실은 인간의 최대의 지혜이며 최량의 방편이다.
오직 성실 하나만으로 일관한다면 한 아들은 한 아버지와 그 이웃까지도 봉양할 수 있지 않겠는가?
지극히 작은 사람도 성심이 있다면 지극히 큰 위선자보다 위대한 것이다.
오늘날 자유의 본질에 대한 인식의 착오로 개인의 자유와 위계제는 이율배반의 것이라고 아는 부하는 없을까. 자유란 남에게 줌으로써 얻어지는 것이며 더 나아가서 의무를 전제로 하는 것이다.
2년간의 체미기간 중 미국인의 자유가운데 가장 앞서는 것은, 지켜야 할 것을 지키는 자유라는 것을 체험했다.  의무를 수행하고 규칙을 준수하고 주어진 명령에 복종한 다음에 누리는 것이 진정한 자유라는 것이다.
위에서는 덕으로 다스리고 아래서는 성실로서 밑받침할 때, 우리들은 명랑하고 복된 사회를 건설할 수 있으며 따라서 막강의 군대를 보유할 수 있을 것을 믿어 의심치 않으며, 우리의 궁극적인 희원인 혁명의 승리도 여기에 지름길이 있지 않은가 생각된다.




(장기범 아나운서는 우리 아버지가 생전에 존경하던 선배 아나운서. 그리고,  아버지의 묘비명을 써 주신 분이기도 하다.  아버지의 장례식이 끝나고 나서도 몇 번 씩 안부 전화를 주신 고마우신 분.  미국에 오기 전에, 김재영 아나운서와 이규항 아나운서와 함께 은평구 대조동에 있던 장선생님을 방문하였는데,  장선생님처럼 훈남이던 아드님이 버스 정류장까지 바래다 주던 기억이 난다.


- 성실은 최대의 지혜이며 최선의 방편이다......나도 우리 직원들에게 성심과 인덕이 있는 상사가 되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