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운서, 최세훈/아버지의 수필 모음

찢어진 일기장

최철미 2014. 2. 8. 13:00

찢어진 일기장


어느 날....어느 날 이라니?  어쩐지 확실한 날은 알기 싫다. 그러기에 난 일기장의 날짜를 빼버리고 흐트러진 여인의 목걸이의 구슬을 다시 줍듯 여기에 찢어진 일기장을 주워 읽어 본다.

그리 맑지 않은 가을 황혼을 넋을 잃은 양 바라보고,  어떤 먼 아득한 환각이 진실인 것만 같은 그 속에 완벽한 이성의 여백의, 나는 확실히 부얀 멍한 꿈에서 활활 타오르는 소리를 듣는다. 그러나 난 우두커니 서 있는 나로 돌아오고, 또 돌아와야 했다. 어떤 더러운, 그러나 정당한 인간성을 박박 찢고 싶고, 그러기 위해선 생을 깨끗이 씻어 버려야 하는 지루한 오뇌,,,,,. 이런 슬픔, 그 곳에 내 생활이 있고 용렬한 이성이 움트고 있음을 누구 부정할 사람은 없는가.

나는 무엇을 숭배해 본 일이라곤 없다. 그건 염세관에 절은, 내 머리의 원인인지는 모르겠다. 하여튼 결함 없는 완전, 숭고함이 어디 있기만 하면 지금이라도 기어코 가보리라.

난 한 일 년 전만 해도 내가 제일 고상한 인간이라고 자부했고, 속세에서의 초월을 절실히 염원했었다. 아마 해탈이라는 그런 과대망상증이겠지... 그것도 어리석은 회고 속에나 처박아 두기로 하자.

뛰어난 교양을 세련하려는 의욕에서인지, 현대어 사전에 이즘 (ism) 이 붙은 말을 모조리 외우기 위해, 난 생전 처음으로 밤을 새웠다. 사람은 누구나 장처 (長處)를 들어내고 싶어 하는 것, 난 내 서투른 말을 캄플라쥐 (camouflage) 하는 데는『톨스토이는 악필이었다.』『루소는 마조키스트이었다.』라든가 이런 태도였다........ 머리가 휘청휘청하였다. 그러나 난 끝까지 모방하려곤 안했다. 좀 더 독창에 입념한 태도를 갖고 싶었느니라.

초상집에 문상 아니 간다고 조르고 나무라던 어머니에게 『인습은 두드려 부시라』고 도로 혀 두런거릴 때의 나,  어머니...이런 것도 지성이라겠는가?

송편과 밤과 달 또...........나는 이런 것을 보고 추석이라 했고, 그래야만 내 추석일 수 있었다. 『성묘하러 안 가느냐?』고 호령할 할아버지도 없었지만 웃저고릴 입고 가야 한다는 어머니의 생각을 되씹어 생각하다가, 약대가 바늘구멍으로 도망하려는 듯 한 내 의사를 깨닫고, 저고릴 어깨에 걸치고 흔들흔들 나섰다. 날은 무척 가을다웠다. 우렁산에 가서 묘 앞에 흰 들국화를 바라보곤『아버지 묫동』 『산소』이런 생각에 잠겼어도 누구 나무라는 개미 새끼 한 마리 없었다.

줄 사람이라곤 없었지만, 꽃을 한 아름 꺾어 암술이 노랑이 꽃으로 된 큰 꽃 하나, 빨간 꽃 하나 단정히 던졌다. 왜 그런지 난 내 행위와 그리고 거꾸로 처박힌 빨간 꽃의 비밀을 아직껏 모르고 있다.

구애된 오늘에서 좁쌀만한 자명을 인식하고 신앙하는 생활, 그걸 끝까지 파보자.

두 번째 자극은 무미한 것, 요번엔 어느 잔잔한 냇가로 나가서 거닐어 볼까. 우리는 거기 소박한 생의 집착을 찾아서 그래야 나도 푸른 허공을 향해 목이 끊어져라 웃어보고 앞으로 달리자.


(신흥 - 1949) 4년 최 세 훈



(전주 신흥 중학교 교지에 실린 아버지의 글.   15살 중학생 무렵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던 우리 아버지.......

내가 다녔던 기전 여중은 신흥 학교 바로 옆, 언덕 위에 있었다...... 고모들의 말에 의하면, 중학생 무렵부터 우리 아버지를 따라 다녔던 여학생들이 많았다고 한다.  아버지를 찾아서 김제 죽산 번드리 집에까지 찾아온 여학생도 있었다니, 소년 시절부터 우리 아버지의 인기를 알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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