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운서, 최세훈/아버지의 수필 모음

때 늦은 공약 3장

최철미 2014. 6. 15. 16:47



'국민이 원한다면' 이라는 전제로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한 날, 방송국은 비로소 '민주혁명'이라는 단어를 쓰며 1주일 전의 '난동'을 뒤엎었다. 표현의 자유를 하나님은 카멜레온에게만 준 것은 아니었다. 불타버린 지프차 한 대가 추녀처럼 버려진 동대문을 거쳐 남산에 걸어 올라간 것은 1960년 4월 26일 정오. 차량 통행이 금지된 포장도로에서 시민들은 느릿느릿 황소 걸음의 평화를 즐기고 있었다. 정치의식이 강한 황우겸 아나운서는 해병대 봉기의 미확인 정보를 입수했다면서 무엇인가를 결행하고야 말겠다는 초조한 눈빛이었다. 4.19 영령들의 이름으로 보복하겠다는 협박장 발송자가 두려워 레이번 선글라스를 끼고 다니는 몇 사람이 함께 소근 거렸다. 공명심과 공포심은 일치하는 때도 있는가?
"미스타 최" 이분은 미스터 최라고 발음하지 않는다.
"아나운서들 중립화 선언을 기초해 보시오. 쓰는 건 당신이 맡아 주셔예지......"
나는 창 밖으로 똘만이 데모를 물끄러미 내려다 보고 있었다. 총소리가 날 때는 머리카락조차도 보이지 않던 거리의 천사들이 성탄전야, 교인들이 이집저집 다니면서 송영하듯, 중요 기관만을 골라 다니면서 게걸게걸 소리치고 팔을 내저으며 욕구불만을 터뜨리고 있었다.
'TOO LATE, Too late......' 시름없이 떠오른 숙어를 손가락으로 연신 무릎 위에 쓰면서 나는 멍청히 앉아 있었다.
"미스타 최, 내 말이 말같지 않아?" 

오늘이 3.15라면, 아니 4.19라면 그 말이 얼마나 말 같았을까? 나는 어쩔 수 없이 양면괘지를 메꾸었다.


"오등은 자에 중립을 선언하노라." 식의 전문과 공약 3장과 같은 세 가지 주장을, 지금은 없어진 명동의 동해루에서 청요리를 씹으며 축조심의했다. 태화관에 갈 것은 왜 미처 생각지 못했던고.

1. 방송은 본연의 자태로 돌아가 불편부당 공정성을 유지해야 한다.
2. 우리들은 방송의 중립화를 촉구한다.
3. 우리들은 앞으로 공정성을 잃은 일체의 방송을 거부한다.

이 공개장 형식의 변명을 인쇄매체들은 광고료 없이도 잘도 실어 주었다.

그러나...... 이 그러나 이후는 부끄러운데 신경통을 고친다는 자석밴드처럼 한동안만은 붐을 이뤘던 방송중립화 논의의 길을 닦아주었다는 것 이외에는 남은 것이 없다. 민권 승리의 그날 거리를 청소하던 대학생들의 빗자루에 아마 쓸려 갔겠지.....

방송이 민중의 공보기관이며 사실의 공정한 전달자이어야 할 본연으로 복귀하기에는 아직도 수없이 건너야할 강, 넘어야 할 산이 있었다. 아나운서 일동 28명이 총사퇴를 건 그 때늦은 으름장의 대표자 회합은 이튿날 성원 미달로 유회되었다. 우유부단 몸을 사린 창백한 인텔리겐챠들을 기다리다 지친 강찬선 방송관은 결의문을 전달하려 홀로 적진에 들어갔다. 공보실장은 애써 부드러워지려고 했다.
"이건 무슨 노동조합운동 같은데...... 공무원의 본분에 어긋나는 거 아니요? 나, 이 결의문 보지 않은 것으로 하고 돌려 드립니다."
중립화 결의는 이 설유 한 마디로 간단히 분쇄되었다. 아직은 목구멍을 포도청으로 여기지 않는 몇몇 소장파들은 행동 통일을 외치며 일렁였으나 타켓은 이미 잡입하고 없었다. 그러나, 괴이하게도 4.19 뉴스와 중립화 선언을 특집한 5월 1일 자 '주간 방송' 16 호를 잔당들은 노기충천, 즉각 회수하라고 명령했다.
"자유당이 다 죽은 줄 알앗!"
죽은 자유당은 그래서 살아있는 공무원들을 마지막으로 뛰게 했다.




(언론통제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방송의 공정보도가 요원하다 ......) 

'아나운서, 최세훈 > 아버지의 수필 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방송 문화 사업에 종사하며   (0) 2014.07.25
언어생활의 유신을 위하여   (0) 2014.07.25
찢어진 일기장  (0) 2014.02.08
진통의 역정에서  (0) 2014.02.08
현 단계의 30대의 과제   (0) 2014.02.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