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운서, 최세훈/아버지의 수필 모음

방송 문화 사업에 종사하며

최철미 2014. 7. 25. 13:23

방송문화사업에 종사하며

미국의 사회학자 포올 라자스펠드 (Paul F. Lazasfeld) 는 라디오의 위력이 원자탄에 필적한다고 말했다.
그 비유는 방송미디어를 원자력과 같이 선용하면 인류의 복지와 문화향상이라는 지평선을 무한히 넓힐 수 있지만 만일 악용하면 무서운 파괴력을 발휘해서 인류의 문화 또는 인류의 생존 그 자체를 위협하고 감소시킬 수도 있다는 말일 것이다.
이 <야누스>의 얼굴과 같은 양면성은 텔레비전이 그의 동족 미디어인 라디오를 능가하고 대중조작과 동원의 영역에서 최강의 관념적 무기로 클로즈 업되던 초기에, 20세기 괴물인 TV의 정체가 <천사의 손길이냐? 악마의 칼이냐?> 로 논란되고 그 위력이 마침내 대중사회를 휩쓸자, < 백치화냐? 전지화냐?>로 효용론이 대립되고 오늘날은 <대중이 원하는 것을 주느냐? 대중에게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주느냐?> 하는 대척적인 명제로까지 발전되어 왔다.
그러나 햇빛이 있는 한 그늘이 따르듯 사물의 양면성은 온갖 것에 공통되는 특질이 아닐까?   H. 켄트릴은 라디오의 특성을 <스위치 하나로서 세계적인 관심을 갖게 되고, 사건에 직접 참여한다는 의식을 주며 동류의식을 갖게 한다>고 분석하면서 <사회적 환경을 확대하는데 있어 라디오처럼 최소의 노력으로 최대의 효과를 올릴 수 있는 수단은 없다.>고 말하고 있다.
라디오는 보도, 교양, 오락, 계몽 등의 여러 메소드로 대중의 판단적 측면을 창조지배하는 강력한 힘을 보유하고 있어, 새로운 사회의 가치를 창조해서 대중의 정신생활을 지배하는 경향에 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라디오의 연보는 어느듯 반세기에 가깝고 켄트릴의 이론은 이미 증명되어 왔다.
민간상업국의 파이어니어인 문화방송의 경영을 맡게 되자, 나는 우선 방송망을 확장하고 출력을 강화해서 써비스 에어리어를 증대하는데 주력했다.
한스 벤케가 말한 바 방송이란 <전기기술을 전제로 하는 조직화>인 이상 그 전달형식의 확충을 선행해야만 했던 것이다.
다음 과제는 청취율의 향상이었다. 확대와 분화로 치닫는 오늘날의 대중사회에서 그리고 광범한 선택권을 누리는 민주사회에서 방송내용의 질적개선만으로 청취율을 향상시키기는 어렵고 그와 병행하는 프러스 알파가 필요하다.
그것은 선의의 씨앗을 뿌려 그 열매를 거두는 자타번영의 기술 --- 공용관계의 끊임없는 유지이다.
이를 위해서 나는 폭넓은 대중방송으로 여러 계층에 골고루 침투하도록 하고 전원이 개별적인 PR 의 창구가 되도록 했다.
한편 매스 커뮤니케이션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기 위해 방송미디어가 갖는 오피니언 리이더로서의 계도적기능과 <국민의 교사> 로서의 교육적 기능을 개발해나가는 <맑고 밝고 알찬 방송>을 기획하고 이를 지표로 삼았다.
그러나 오락방송과 C.M에 대한 식자들의 비판은 언제나 있기 마련이다.
오락은 수단이지 목적일 수 없다는 논의와 과다광고에 대한 염증이 그 비판의 저류인데 그들은 자칫 불특정다수의 여러 계층을 대상으로 보내지는 푸로그램의 슈우거 코우팅--- 당의정의 겉만 피상적으로 핥아볼 뿐. 우리들이 그속에 어떠한 성분을 스며 넣으려 했는가 하는 노력을 간과하기 일쑤였고 또 C.M이 생산자와 청취자간에 일종의 윤활유역할을 해서 산업발전에 기여하는 강한 잠재력을 무시하려 들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집산지이며 국민의 정신적영양의 공급원이기도 한 방송국이 국민의 재산인 전파로 그 기능과 역기능을 사회에 어떻게 영향하는가와 문화의 오염을 어떻게 균점시킬 것인가 하는 과제는 텔레비전을 경영하게 되면서 더욱 새롭고 깊게 체험할 수 있었다.

시각화된 라디오라 할 수 있는 텔레비전은 맥루한의 이론대로 쿨 미디어로서 그 반대개념인  핫 미디어보다 더욱 비판의 여지가 넓어진다.
별명을 붙이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라디오를 <장님을 위한 예술>이라고 불렀지만 텔레비전은 <20세기의 창> <현대문명의 장남> 또는 <바보 상자> <백치의 20인치>등 많은 별칭으로 불리웠다.
이 별종의 함축에서 우리는 새로운 매체의 출현에 대한 경탄과 비난이 얼마나 엇갈려 왔는가를 엿볼수 있다.
더우기 그 효용론을 두고 <일억총백치화>라고 내뱉은 일본의 지성 대택장일의 발언이나 케네디 대통령에 의해 임명된 미국의 F.C.C 위원장 미노 (Minow)씨가 1961년 5월에 행한 유명한 <미노 발언> ----- 오늘날의 텔레비전 프로그램은 마치 <광대한 서부의 황야>와 같은 것이며 <광대한 낭황지역 (Vast Wasteland)에 불과하다고 지적한 역사적 연설은 많은 시사를 던져주었다.
제3차산업의 스타로서 이윤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기업적 성격과 공공봉사를 임무로 하는 매스콤적 성격을 어떻게 조화시켜 나갈 것인가 하는 문제는 세계 각국의 텔레비전이 앓는 햄릿의 고뇌 같은 것이다.
텔레비전 개국의 숨가쁜 고비를 지나 어느듯 1주년을 눈앞에 두고 프로그램이 안정 괘도에 올랐다고 볼 수 있는 지금까지 각계에서 보내온 의견은 실로 다양다기했다.
종합매체의 특성에서 오는 강한 영향력과 이에 따르는 높은 관심도 때문만은 아닌 제3의 텔레비전 출현에 대한 기대가 얼마나 컸던가를 엿볼 수 있는 그 반의에서 나는 문득 텔레비전 사업이란 <길 가운데 집짓기>와 같다고 느꼈다.
특정의 의견은 언제나 특정인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텔레비전의 대상은 불특정다수의 시청자인 것이다.
<프로그램밍 콘츄롤의 힘은 방송실무자가 쥐었을 때는 독선, 스폰서가 쥐었을 때는 횡포, 일부 시청자가 쥐었을 때는 편벽, 정부가 쥐었을 때는 선전이 되기 쉽다.>는 말은 아직까지 원리인 것 같다. 그 최대공약수를 어떻게 산출할 것인가?
또한 제한된 시간에 하나 밖에 없는 스크린으로 여러 계층을 일률적으로 만족시킬 수 없는 것이 텔레비전의 숙명이다.
그래서 시청자의 기호를 맞추기 위해 광대한 낭황지역(Vast Wasteland)인 텔레비전이 프로그램 연구와 애용자의 동태파악에 힘을 기울이는 광대한 취미지역(Vast Tasteland)로 변힌다는 파라독스가 있거니와 수용자를 위한 봉사의 최소공배수는 무엇일까?
그 최대공약수와 최소공배수의 기준치는 봉쌍스라고 하는 실무자들에게 야기한다.
진선미의 판단은 때와 장소와 양식과 인간적인 양심으로 결정할 수 밖에 없다.
<피에레산맥 이쪽의 정의가 산맥 저쪽에서는 불의가 된다.>고 파스칼은 일찌기 설파하지 않았던가?
또한 <대중이 바라는 것을 주느냐?> <대중에게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주느냐?> 하는 극단의 두 명제 모두가 시청자의 선택권을 평균화된 경험의 영역에 한정시켜 버린다는데서 문제가 제기되므로 여기에도 첵크.앤드.밸런스가 이루어져야 한다.
학자들은 매스콤의 이론에 디스펑션 (역기능)이라는 의학용어를 도입해서 그 증상을 일괄하면 마취작용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오늘날의 산업적 대중사회에서 매스콤의 유혹적인 전달내용은 일견 대중의 혼을 정화시키고 인간을 소외로부터 회복시키는 듯 하나 사실 그것은 인간의 착각이며 비생산적 감각적인 대중예술은 인간을 최면상태에 빠뜨리는 마취작용을 한다는 것이다.
특히 방송은 대중에의 영합을 위해 모든 가치를 하향하고 표준화하므로서 그 레샴의 법칙이 통용되고 있다고 그들은 주장한다.
사실 이순신의 위업보다는 장희빈의 요사에 더 귀 기울이고 무의미한 웨스턴이 건전한 국민가요를 압도하는 현상이 없지않다.
로고스와의 편애에만 집중한 지식인과 말초신경에만 예민한 대중이 함께 추구해야할 최대공약수적 이데아를 매스콤은 주시하고 또 이끌어야한다.
그러므로 메스콤의 역기능을 배제하고 <저너리즘의 통합으로서의 방송>의 빛나는 내일을 위해 나는 방송이 <국민의 교사>라는 입장에 투철해야한다고 믿는다.
사회이익에 적응하는 문화재를 방송에 담고 사회적으로 타당한 이념을 요망하는 계도적인 기능, 그것을 확충해 나가는 것이 <맑고 밝고 알찬 방송>의 이념이며 그 지표에 하루하루 접근되어 간다고 나는 자신하고싶다.

( 아버지께서 1960 년대 당시 문화 방송 조증출 사장을 위해 쓰신  연설문 - 'MBC 문화방송 원고지' 라고 인쇄되어 있는 갱지 -  200 자 원고지 21매에 육필로 쓰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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