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들의 글모음/작은 딸, 윤경이의 일기

1984.2.12

최철미 2014. 6. 15. 12:27

(2.12)
눈 붙일 겨를도 없이 어제 하루를 지새웠다. 오늘은 소복이 도착해서, 난 생전 처음 소복을 입어봤다. 이렇게 일찍 이런 것을 입을 줄은 몰랐는데…. 오늘은 손님들의 방문이 좀 뜸했다. 하지만, 향냄새는 여전히 코를 찔렀다. 두 번째 맡아보는 냄새였다. 첫 번째는 작은 할머니 돌아가셨을 때였고, 두 번째는…. 아직도 아빠의 죽음이 좀처럼 실감나질 않았다. 어딘가 멀리 계신 것만 같았다. 갑작스러웠기 때문일까? 집안 어딘가가 예전보다 달라진 것 같았다. 이렇게 하얀 꽃들이 즐비한 적도 없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돈을 주고 간 적도 없었다. 더구나 여자들이 하얀 소복을 입고 집안을 돌아다닌 적도 없었다. 모든 것이 나에겐 생소했고, 모든 것이 다르게 보였다. 아빠가 안 계시니까 모든 게 달라졌다. 한 마디로 개판이었다. 상속과 재산 문제, 조의금 문제 등. 예전엔 우리가 개입하지 않아도 아빠가 모든 일을 척척 처리하셨는데…. 이젠 생판 모르는 사람들이 저희 맘대로 처리해 버린다. 아빠가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계셨는지 이제야 어렴풋이 깨달았다. 아 아빠. 왜 돌아가셨어요. 너무도 많은 문제를 남겨 놓고 가셨어요. 아빤 바보에요. 앞으로 살아갈 길이 막막하다. 하지만, 아빤 내 마음속에 살아 계시고, 언제나 날 지켜보실 것이다. 이젠 우리도 뿔뿔이 흩어져 살아야 하고…. 아빠. 우릴 도와주세요. 가는 곳마다 지켜주세요. 아빠. 꿋꿋하게 살아갈게요. 남들 보란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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