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들의 글모음/작은 딸, 윤경이의 일기

1984.1.20

최철미 2014. 6. 15. 12:57

아빠께서 요즘 많이 편찮으신 모양이다. 엄마가 다녀간 이후로 난 아빠에게 언제나 냉소를 띄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 잘못 한 것만 같다. 병원에 며칠 입원하셨다가 퇴원해 집에 계신 아빠. 며칠째 회사도 안 나가시고 누워계신다. 간경화증이라는데, 발견이 늦어 자칫 잘못하면 암이 될지도 모른다고 언니는 말했다. 난 순간 귀를 의심했다. “암이라고? 그럴 리가…. 그런 건 다른 모르는 사람에게나 생기는 병인 줄 알았는데….”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는 느낌이었다. 기가 막혀 눈물도 나오질 않았다. 나의 손을 잡으려고 쭉 뻗은 아빠의 손. 가늘고 신 손이었다. 그 손이 나의 어깨에 와 닿을 때면 그 따스한 체온이 셔츠를 통해 피부에 와 닿는 걸 느꼈다. 밥도 제대로 못 드시고, 제한된 음식만을 드셔야 한다. 애써 웃으시는 아빠의 얼굴을 보니, 오랫동안 쌓여온 증오와 고통과 분노가 일시에 사그라져버린 것 같았다. 난 일부러 명랑한 척했다. 오빤 아주 비관적인 말투였다. 말끝마다 비꼬는 오빠가 미웠다. 아빤 너무도 거부적인 오빠의 반응에 마음이 상하신 것 같았다. 후-. 아빠 제발 하루빨리 나으셔요. 이제부터는, 아빠께 걱정 안 끼치는 딸이 되어드릴게요. 무엇보다도 아빤 마음의 안정이 필요하단다. 이럴 때 엄마라도 계셨으면…. 하지만, 엄마에게 바램이란. 난 이럴 때 무얼 어떻게 해야 할지 몸둘 바를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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