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들의 글모음/작은 딸, 윤경이의 일기

1984.1.19

최철미 2014. 6. 15. 12:58

(1.19)

내가 죽어야만 할 때, 만약 그때에 생각할 여유가 주어진다면 난 과연 무엇을 생각할까? 일생을 헛되이 지내버린 일, 잠자며 살아버린 일, 어리둥절하게 지낸 일들, 인생의 선물을 완전히 음미하지 못한 일들을 생각할까? “무슨 까닭이지?” 벌써 죽어야 한단 말인가? 이다지도 빨리? 그런 법이 어디 있단 말인가? 나는 아직껏 무엇 하나 이룬 것이 없지 않느냔 말이다. 나는 겨우 무엇인가 하려고 이제 막 계획했을 뿐인데…. 하고 탄식하는 소리뿐. 지나간 일들을 다시 생각할까? 내가 지내온 극히 사소한 빛나는 순간을, 소중한 모습이나 그 얼굴의 생김새를 생각해낼까? 자신의 나쁜 짓을 다시 생각해낼까. 그리고 너무나 늦은 후회심이, 타는 듯한 괴로움이 내 가슴에 밀려올까? 아니다. 나는 구태여 그런 것을 생각지 않으려 들것이다. 가는 길을 어둡게 하고 있는 무서운 암흑으로부터 자신의 주의심을 돌리고 싶어 억지로라도 무언가 얽힌 잡념에 사로잡힐 것이다. 내 눈앞에서 일찍이 빈사상태의 사나이는 마른 호두를 씹혀주지 않는다고 울상이다. 더욱이, 그곳에는 그의 흐린 눈동자 밑바닥에는 상처를 입고 바야흐로 죽어가는 새의 찢어진 날개처럼 무엇인가가 괴로운 듯 떨고 있을 뿐이다. 죽음을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사람은 흔히 각오를 하고 죽는 게 아닌 것이다. 막연하게 그것도 습관에 의해 죽는 것이다. 인간은 대부분 죽지 않을 수 없는 까닭에 죽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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