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들의 글모음/작은 딸, 윤경이의 일기

1984.1.16

최철미 2014. 6. 15. 13:04

1.16
자기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경탄할 일이다. “내가 지금 이 세상에 살아있다!” 이 놀라움이 곧 산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아침에 다시 눈을 떠서 다시 떠오르는 태양을 보았을 때, 그것은 엄숙한 놀라움이 아닐 수 없다. 하루하루 주어진 생명을 감사하며 감격으로써 살아가라는 타고르의 말이 있다. 그러나 나는 어떠한가! 매일매일 지겨운 삶을 살아간다고 투덜투덜 대고 있지 않은가. 나는 살아갈 가치가 과연 있을까? 그런 판단을 내리는 것. 그것이 철학적인 기본적 물음이다. 죽음. 죽음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좋은 것은 아예 태어나지 않는 것이다. 죽음, 그것은 길고 싸늘한 밤에 불과하고 삶은 무더운 낮에 지나지 않는다.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잠자코 은신하며 가혹한 운명의 돌팔매와 화살을 받고 참고 견딜 것이냐? 그렇지 않으면 칼을 휘둘러 닥쳐오는 고난과 대항하여 그 목숨을 끊어 놓을 때까지 후퇴하지 않을 것이냐? 죽음은 잠. 그것뿐인 것이 아닐까? 자서 가슴을 아프게 하는 괴로움도, 육체에 달라붙은 이 무수한 괴로움도 없어져 버린다면 이에 대한 행복은 없는 거다. 죽음은 잠이다. 잔다. 아니면 꿈도 꾸리라. 그것이 싫다. 이 삶의 육체에서 이탈했을 때, 그 영원한 잠을 어떤 꿈이 괴롭힐 것인가. 그것이 마음에 거리낀다. 인생의 고뇌를 언제까지나 없어지지 않게 하는 건 바로 그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누가 이 세상의 험한 비난의 채찍질을 견디면서 권력자의 횡포와 거만한 자들의 모멸과 부실한 사랑의 고민과 성의 없는 재판의 불공평함과 소관리들의 안하무인적인 관료적 태도와 상대방의 관용을 기화로 기광하는 소인배들의 거만하고 무례함을 참을 것인가? 마음만 먹는다면 이 단도의 일침으로써 언제든지 이 세상을 하직할 수가 있는데도…. 이 무거운 짐을 견디면서 생활의 압박에 신음하면서 피땀을 흘리는 것은 아무렇지도 않다. 다만 죽은 후에도 또한 일말의 불안이 남는다는 그것 때문에…. 미지의 세계, 한 사람의 나그네도 되돌아 온 예가 없는. 결심이 흐려지는 것도 당연하리. 보지도 못하던 타국에서 남모를 고통을 받는 것보다는 낯익은 이 세상의 고뇌를 참는 것이 좋겠다는 마음도 들리라. 반성이란 언제나 사람을 겁쟁이로 만든다. 결심의 창백하고 생생한 혈색이 우울하고 창백한 안료로써 굳게 뒤덮여 칠해지는 것이다. 건곤일척의 대사업도 그 흐름에 편승하지 못함으로써, 행동의 계기를 잃는 것이 일쑤이다. 모든 멜랑콜리 한 테마 중에 가장 멜랑콜리한가? 바로 죽음이다. 인간은 결국 하나의 종점으로 향한다. 즉 그것은 무덤이다. 나도 예외일 수는 없다. 왜냐고? 나도 인간이기에. 죽음은 나, 아니 인간에게 있어 두려운 존재가 아닐 수 없다. 한 치에 어긋남이 없는 정확한〈끝〉인 것이다. 이 세상이 내 손아귀에 들어온다 하더라도 내일 나의 죽음이 있다면 이 또한 슬픈 일이 어디 있겠는가. 하루하루를 무언가 뜻있게 보내야 할 게 아니었던가. 이제껏 나는 무얼 했단 말인가. 인생의 1/4 지점에 와 있는데. 나의 진정한 모습을 조각해 나가자. 그야말로 삶은 단 한번 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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