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들의 글모음/작은 딸, 윤경이의 일기

1984.1.10

최철미 2014. 6. 15. 13:34

1.10
1월이 된지도 벌써 열흘째. “남자들은 복잡한 감정을 떨쳐버리려고 영화를 본다. 반대로 여자들은 그런 감정을 맛보려고 영화를 본다. 이래서 남녀 모두를 흡족 시키는 영화가 드문 이유 중의 하나다.” 리더스·다이제스트에서 우연히 지나친 말이다. 그러나 난 복잡한 감정을 떨쳐버리려고 극장엘 갔다. 내가 자주 드나드는 극장엔 몇 푼 안 되는 돈으로 재 상영 되는 영화 한편을 즐길 수 있다. 영화들은 대게 구성이 그렇고 그렇지만 머리 가득히 꿈을 채워 넣을 수 있었다. 그것이 내게는 인생의 거울과도 같다고나 할까? 인생도 영화처럼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오늘 상영프로는〈부시맨〉이었다. 이야기는 아프리카 칼라하리 사막에 떨어진 콜라병 하나부터였다. 국제 유모어 영화제 그랑프리 수상작이었기 때문인지 배를 쥐고 깔깔 웃어댔다. 스트레스가 말끔히 해소된 것 같았다. 올해 들어 열흘밖에 안 지났지만 그렇게 크게, 그렇게 오랫동안 웃어본 적은 처음이었다. 지금도 생각만 하면 웃음이 터져 나온다. 극장을 나오니 이제 현실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그래. 조금 전까지의 윤경이로 돌아가야겠지. 현실을 도피하지 말자. 신의 뜻을 어찌 거역할 수 있으리오. 그래, 언제나 해밝은 웃음을 간직하고 있자. 그리고 남에게도 웃음을 선사할 수 있는 밝고 명랑한 애가 되자. 그러나 언제이고 시작은 어두운걸까? 마치 터널 속을 들어가는 기분인걸. 단지 어디엔가 어둠을 벗어나는 끝이 존재할 것이라는 희미한 희망만을 간직한 채….아, 내가 왜 이럴까? 희망, 환희, 기쁨만을 생각하자. O.K? 왜 안 된다는 거냐. 해보자고. “도전”해보잔 말이야 이 맹꽁아. 현실마저 망각하고 도피하고만 싶은 바보…. 바보가 된 나. 어쩐지 내 자신이 불쌍해지려고 한다.



'가족들의 글모음 > 작은 딸, 윤경이의 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1984.1.8  (0) 2014.06.15
1984.1.9  (0) 2014.06.15
1984.1.11  (0) 2014.06.15
1984.1.12 - 시간의 노예 (시)  (0) 2014.06.15
1984.1.13  (0) 2014.06.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