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들의 글모음/작은 딸, 윤경이의 일기

1984.1.8

최철미 2014. 6. 15. 13:39

(1.8)
전 모든 것을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저를 스쳐지나가던 모든 이들. 그들은 제게 언제나 너를 떠나지 않겠노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떠나버렸습니다. 제게 상처만 남겨두고는. 그들은 제가 없어도 행복하게 살아갑니다. 전 느꼈습니다. 난 세상이 필요치 않는 하찮은 존재라는 것을. 그래요. 절〈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존재〉로 생각해 준 사람은 세상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전 그들을 탓하지 않습니다. 저의 비련은 제가 태어남으로써 생긴 일이었으니까요. 그래서 전 결심했습니다. 이제 모든 것은 끝이다. 영원한 끝. 곧 죽음을 의미했답니다. 결코 슬퍼하진 마세요. 인간은 최종적으로 가야만 하는 곳으로 유유히 사라져버리니까요. 조금이나마 여러분 기억 속에 살아 숨 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지만 여러분은 세상을 비판만 하던 어느 미치광이가 사라져버린 것으로 생각하시겠죠? 할 수 없는 일이죠. 모든 것은 제 탓이었으니까. 제가 초등학교 4학년 때 “엄마, 아빠 같이 살아요.” 라는 유서를 남기고 한강에 몸을 던진 그 애가 생각납니다. 용기. 그에겐 용기가 있었죠. 저도 같은 운명이면서도 전 이렇게 뻔뻔스럽게 살아있으니 말입니다. 그 애와 얘길 나누고 싶어요. 우리의 비겁한 아빠, 엄마들…. 결국 저도 그 애와 같은 사고방식으로 살아가다가 똑같은 이유로 자살하는 군요, 그럴 수밖에, 우린 같은 운명을 지니고 태어났으니까. 아, 몸이 나른해진답니다. 정신이 혼미해진 까닭일까요? 역사에 남을만한 인물이 되고 싶었는데…. 안녕히 계세요. 결국 우리들 인간은 이런 허무함속에서 죽어갈 테니까 우린 언젠가 다시 만나겠죠. 특히, 제게 특별한 그 무엇을 가르쳐 주신 분께 말씀드리고 싶어요. 죽어서 죄송하다고요.
1984. 1/7~1/8
인간의 종점인 무덤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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